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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전문 변호사 이명숙의 ‘사랑과 전쟁’스물여덟 번째

아버지가 죽은 뒤 알게 된 사실

On December 20, 2013


A(남자)씨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질 않았다. 고위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시자 가정법원에서 친자 확인 소장이 송달돼 온 것이다. 결혼한 여동생의 집에까지 말이다. 그 소장에는 처음 보는 한 여인이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함께 찍은 결혼 사진, 두 아들의 돌 사진, 최근 가족의 모습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두 집 살림을 해왔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이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슬픔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배신감과 분노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A씨 기억 속의 아버지는 따뜻하고 가정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수많은 여성들과의 외도로 어머니와는 싸움의 연속이었다. 주말이면 어머니와 함께 귀가하지 않은 아버지를 찾아 아버지가 머물 만한 낯선 여자 집을 찾아다녔고, 그렇게 찾아다니다 보면 어딘가에서 파자마를 입고 막 깨어난 부스스한 모습으로 마주하곤 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했다.

고위공무원 신분으로 철저히 자기 관리를 하면서 한평생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성과 함께해온 아버지도 원망스러웠지만, 그런 아버지와 헤어지지 못하며 한평생 집 나간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어머니도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아버지가 고위공무원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도 바로 이혼해버리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택했겠지만 남의 이목이 있고 가정사가 아버지의 승진에 불이익이 될까 봐 늘 노심초사였다. 그런 이유로 언젠가부터 한 지붕 두 가족처럼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날아든 소장에 첨부된 사진 속의 여인은 듣도 보도 못한 생면부지의 여인이었다. 어머니도 A씨도 아버지를 거쳐 간 여인네들이라면 거의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수십 명의 여인네들 중에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들 형제의 나이를 보니 이미 20년은 족히 되어 보였고, 그 오랜 기간 아버지는 그 여인과 간소하게 결혼식도 올리고 아들 형제의 백일잔치, 돌잔치, 입학식, 졸업식까지 다 챙기며 살아왔다는 사실이 기가 막힐 뿐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곳에 숨어 있던 여인네도 아들 형제를 앞세워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와 명성, 재산 상속을 노려 아버지의 친자식임을 확인하는 소송을 제기했을 터인데, 아버지의 살아생전 여성 편력을 생각해보면 앞으로 언제 또 누가 ‘아버지의 아들이요 딸이다’라고 나타나서 수많은 이복(異腹) 동생들이 소송을 제기해 올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여동생은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좋은 집안으로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가 갑자기 송달된 친자 확인 소장으로 인해 시부모님으로부터 당장이라도 이혼 요구를 당할 위기에 놓인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이 사실이 기자들에게 알려지면 가십거리로 기사화되는 것은 물론, 네티즌의 아버지에 대한 질타가 쏟아질 것이 분명했다. A씨는 여동생이 이혼당하는 것은 물론 평생 아버지로 인해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밤잠이 오지 않았다.

이에 A씨가 필자의 사무실로 찾아와 ‘하루라도 빨리 조용히 사건을 처리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유전자 검사를 할 것도 없이 사진 속의 이 사람이 우리 아버지가 사실인 이상, 아버지의 혼외자가 맞다며 법원에서 정리해달라’고 부탁하였고, 그렇게 사건은 소장을 접수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소리 소문 없이 끝나버렸다.

A씨는 법원에서 그간 말하지 못했던 속내를 토로하며 오열했다.
“내 몸속에 바람둥이 아버지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만으로 한평생 나는 내 피를 원망하며 살아왔습니다. 내 안에 흐르는 피를 다 뽑아버리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성(姓)과 본(本)을 모두 버리고 싶은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왔는데, 아무리 재산이 좋다지만 그 피가 뭐가 좋다고 소송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원하는 사람들에게 다 주십시오. 단, 내 성과 본 좀 바꾸어주십시오.”
장내를 숙연케 한 오열이었다.

  • 이 변호사의 어드바이스
    법률상 처가 아닌 다른 여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를 ‘혼외자’라고 칭한다. 아버지가 자신의 자녀로 가족관계등록부에 신고할 수도 있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하거나 우선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으로 하여 자신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신고할 수도 있다. 혼외자는 아버지의 자녀로 인지되지 않는 이상 상속을 받을 수 없는지라, 아버지가 인지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친자 확인 소송을 통하여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가족관계등록부에도 기재되며 상속도 받을 수 있게 된다.

    A씨처럼 아버지의 성(姓)과 본(本)을 버리고 싶다는 사람이 간혹 있다. 친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딸처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면 현행법상 아버지의 성(姓)과 본(本)을 자녀가 임의로 변경하는 것은 법원이 허가하지 않는다.

글쓴이 이명숙 변호사는…
24년 경력의 이혼·가사 사건 전문 변호사로 현재 KBS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 2>의 자문 변호사로 활약하고 있다.

CREDIT INFO

기획
하은정
일러스트
정대영
2013년 12월호

2013년 12월호

기획
하은정
일러스트
정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