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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야망>에서 미자가 태준을 다시 만난 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오늘이, 내 인생의 클라이맥스 같아.” 나는 그 말이 너무도 오래 남아, 자꾸만 순간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도록 오래 남는 것. 팍팍한 일상을 돌아가게 하는 참기름 같은 것. 바로 드라마 속 명대사다.<br><br>[2008년 12월호]

UpdatedOn November 20, 2008

Words 박미혜(자유기고가) illustration 장재훈 editor 이지영


대사에는 두 가지 타입이 있다. 희대의 명대사를 찍어냈던 영화 <넘버3>를 예로 들어서 설명해보자. <넘버3>의 명대사라고 하면 박은 데 또 박을 수 있고 삽질한 데 또 한 번 삽을 꽂을 줄 아는 ‘헝그리 정신(!)’, 그리고 그걸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 날리는 ‘배신이야, 배신!’을 꼽겠다. 불사파 대장 송강호의 잘빠진 연기에 대한 오마주 역시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약간의 제스처(몸짓이나 말투의 뉘앙스)가 함께해야 그 맛이 사는 명대사다. 아니, 이런 명대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제스처에 가깝다. 사람들의 입 끝과 손끝에 달려서 심심할 때 제스처로 소비되다가, 어느 순간 촌스럽게 느껴지면 훌쩍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된다.

명대사의 두 번째 유형을 꼽자면 바로 삼류 조폭 한석규에게 최민식이 너 하고 싶은 대로 맘대로 해보라고 했을 때 한석규가 검사님은 “뭘 하고 싶든지 그걸 하지 마쇼”라고 한 한마디를 들 수 있겠다. 여전히 나는 술자리에서 이상한 농담을 하려는 친구에게 한마디 던진다. “네가 뭘하고 싶든지 간에 그걸 하지 말아라”고. 결국 명대사란 캐릭터를 벗어나서도 생명력을 가질 만한 재치로 채워진 긴 문장을 뜻하는 것이다.

첫 번째 유형의 명대사가 굵고 짧게 사람들 사이를 머물다 간다면, 두 번째 유형은 길고 가늘게 생존한다. 잊혀질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술자리에 출몰한다. 또다시 잊혀졌다가도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귀환한다. 여기서 나는 첫 번째 유형, 제스처에 가까운 명대사들을 모두 제치고 두 번째 유형의 명대사들, 바로 팍팍한 우리 삶에 치는 참기름 같은 존재들을 한 번 짚어보려고 한다.

달달하지만 느끼하지 않은 명대사가 퐁퐁 솟아나왔던 드라마가 있었다. 바로 몇 달 전 종영한 <달콤한 나의 도시>다. 그 대사를 뿜어내던 주인공은 바로 나이차 때문에 위축되어 있던 연상녀를 감싸주는 귀여운 연하남, 지현우다. “누나, 우주의 나이가 몇 살이게요?” “1백40억 살.”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우린 동갑이나 마찬가지예요.”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동갑인 연하남 애인. 하지만 의젓한 연상남에 비하면 무모해 보이기도 하고 오히려 그래서 젊음이 더 눈부시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른바 그녀(최강희 분)는 연상남과 연하남의 매력을 모두 알고 행복한 고뇌를 하는 셈이다. 그 풀리지 않는 딜레마를 잘 짚어내는 명대사가 있다.

“나는 지금 사탕을 녹여 먹는 남자의 차를 타고 사탕을 깨물어 먹는 아이를 만나러 간다.” 사탕을 깨물어 먹는 맛과 녹여 먹는 맛의 미묘하면서도 확실한 차이를 연하남과 연상남에 빗댄 이 명대사는 수많은 여성에 의해 술자리에서 인용된다. 사랑에 대한 푸념, 애인에 대한 설명은 이제 한마디로 요약되는 것이다. “그이는 이를테면 사탕을 녹여 먹는 남자거든.”

사랑에 대한 명대사로 남으려면 이런저런 연애의 수식 어디에나 대입하든 풀려야 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에서 츠마부키 사토시가 “헤어지고 나서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관계가 있다. 그러나 나와 조제는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라고 서글픈 어조로 말한 이후로, 나는 실연당한 친구와 술 마시면서 이 말을 백 번 반복해 들어야 했다. 헤어지면 친구가 될 수 있는 관계도 있지만, 나와 그 애는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고. 누구의 가슴이든 치고 가기 때문에 어느 연애에나 들어맞는 대사, 그게 바로 명대사라 할 것이다.

풀리지 않는 인생의 숙제 앞에서 명쾌하게 답을 내주는 한마디 명대사가 있다. 그런 대사를 주워섬길 수 있는 드라마가 바로 <베토벤 바이러스>다. 주인공 강마에의 대사는 풀리지 않는 인생 앞에 고개 숙인 중생들의 고개를 비틀어 돌려서라도 세운다.

대사를 ‘제조하는 데’ 탁월한 실력을 발휘한다. 요즘 한창 진행 중인 드라마 <그들이 세상>

2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우리의 가슴을 싸하게 해주었다. “…설렘이 한순간에 무너질 때가 있다. 바로 권력을 만났을 때이다. 사랑도 예외는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강자이거나 약자라고 생각할 때, 사랑의 설렘은 물론 사랑마저 끝이 난다. 이 세상에 권력 구조가 끼어들지 않는 순수한 관계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설렘이 설렘으로만 오래도록 남아 있는 그런 관계가 과연 있기는 한 걸까?”

온갖 치졸한 감정 때문에 사랑이 어딘가로 증발해버렸을 때, 연애에서 스스로 소모되고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누가 지금 이 연애에서 강자이고 약자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권력 관계를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노희경은 바로 그 순간을 탁월하게 잡아내서 우리에게 물어본다. “설렘으로만 오래도록 남아 있는 그런 관계가 있기는 한 거니?”라고. 그리고 술자리에서 또 한 번 주억거린다. 아직도, 아직은 설레고 있다는 친구에게 씁쓸한 어조로 악담 한마디 건네주는 것이다.

명대사라는 건, 연애에만 들어맞는 게 아니다. 풀리지 않는 인생의 숙제 앞에서 때로는 유치해도 명쾌하게 답을 내주는 한마디, 명대사가 있다. 그런 대사를 주워섬길 수 있는 드라마가 바로 <베토벤 바이러스>다. “…욕심! 넌 그걸 출세니 명예니 그딴 걸로만 파악하는 모양인데, 진짜 욕심은 그게 아냐. 이 안에, 네 열망이 얼마나 부글부글 끓고 있느냐지. 욕심은 다른 말로 힘이야. 얼마나 힘들건 뭐가 어떻게 가로막든 간에 다 뚫고 나오는 힘! 독기!” 홍자매가 전업 작가인 아버지를 의식, 무의식적으로 이미지 메이킹해서 만들어냈다는 주인공 강마에(김명민 분)의 이 대사는 풀리지 않는 인생 앞에 고개 숙인 중생들(대략 시청자)의 고개를 비틀어 돌려서라도 세운다. 욕심은 다름 아닌 뚫고 나오는 힘이라는 명대사는 추해지지 않고 부드럽게 한 인생 가보려고 했던 마음속 나태함을 꼬집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명대사라는 게, 사실 상황이 맞아야 마음에도 먹혀든다. 얼마 전 종영한 <엄마가 뿔났다>의 주인공, 뿔난 엄마 김혜자가 어느 날 ‘파업 선언’을 한 적이 있었다. 세 명의 자식들에게 당당하게 읊었던 “너희 셋이 한 달에 1백만원씩 모아서 내게 주면 돼. 내가 30년 너희를 위해 봉사한 게 그 돈보다 작다고 생각하니?”라는 대사 앞에서 어머니는 충격을 받은 듯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계셨다. 30년 무보수 봉사를 받아온 자식은 곤혹스러워서 슬그머니 제 방으로 들어갔지만, 엄마에겐 올해 최고의 명대사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랑을 얘기하는 명대사도 내가 연애할 때에야 절절하게 들리고, 인생을 읊어대는 명대사도 내가 힘들어야 번쩍 가슴에 와 박히는 법. 결국 내가 처한 상황과 꼬라지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그 대사가 가슴을 쳐오면 그게 바로 명대사다. 우리는 드라마를 보다가도 휴대폰을 들어 친구에게 문자 하나 날리게 되는 것이다. ‘욕심이 바로 힘이란다’ 하고는 느끼할까봐 이모티콘 하나 붙여놓는다.(^^a) 퍽퍽한 인생 옆에 명대사는 그렇게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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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 박미혜
illustration 장재훈
editor 이지영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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