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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다한 이야기

<아레나>의 얼굴은 강하지만 화려하지 않다. <아레나>는 군더더기 없는 단정함을 추구한다. 그래서 가능한 컬러 사용을 자제하고 서체는 장식과 기교가 없는 고딕과 헬베티카를 고집한다. <br><br> [2007년 8월호]

UpdatedOn July 19, 2007

가장 매력적인 표지는 한 컷의 사진과 세련된 서체의 조합에 있다. 내면적으로는 기사의 우월성을 앞세운 강력한 카피가 우선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디자인의 우수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그래서 쉽사리 눈에 띄지 않으면 누구도 그 카피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시선을 붙잡는 것만이 최우선 과제란 말이다. 대형 서점의 잡지 코너에 가면 ‘날 사가세요’라고 아우성치는 고만고만한 잡지들이 우리의 동공에 알몸을 하고 덤벼들지 않던가? 군집을 이뤄 오글거리는 잡지들은 수백 개의 얼굴을 들이밀고 수천 개의 카피로 떠들어댄다. 이 조밀한 광장에서 외유내강의 법칙은 통하지 않는다. 외강내강의 법칙만이 승부수로 내던져질 뿐이다. 때때로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밤새도록 함께 떠들어주고 보듬어주는 불알 친구 같은 독자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신뢰를 ‘헐벗음’으로 무너뜨리는 것 역시 순식간이니 매번 시의 적절한 옷을 갈아입고 문밖을 나서야 한다. 매달 머릿속에 새 지식을 넣고 심장엔 또렷한 감수성을 각인하고 잰 걸음으로 쇼윈도를 훑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려입는 것이 잡지의 숙명이고 의무란 말이다. 잡지로 가는 대문인 표지는 이 일련의 과정을 내비치는 ‘거죽’이다. <아레나>의 얼굴은 강하지만 화려하지 않다. <아레나>는 군더더기 없는 단정함을 추구한다. 그래서 가능한 컬러 사용을 자제하고 서체는 장식과 기교가 없는 고딕과 헬베티카를 고집한다. 서체와 컬러가 제각각 튀지 않음으로써 사진과 합일할 수 있도록, 표지 모델과의 밀착감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다. 당연히 표지 모델의 의상 역시 장식이 없어야 하고 눈빛이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라가 센 것이 우선이다. 그 혹은 그녀에게서 거풋한 기운이 돌거나 다방면에서의 실력 혹은 업적 평가가 난해한 경우라면 <아레나>의 표지 자리를 차지하기 어렵다. 게다가 ‘내외면의 스타일리시함(이 단어는 왜 한글로 표현하기가 애매한 건지 참…)’을 추구하다보니 배제되는 인물도 생긴다. 물론 이런저런 상한선에 부합하는 인물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아니 너무 어렵다. 게다가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패션지인지라 생면부지의 인물을 모델로 할 수도 없다. 디자이너, 작가, 음악가 등 출중한 업적을 이룬 인물들이 리스트에서 자주 누락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렇다고 패션모델이 최신 제품을 입고 등장하는 유형의 표지는 제작이 쉬운 만큼 뭔가 부족하다. 그러기엔 <아레나>가 추구하는 ‘패션’은 심히 다의적이다. 옷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된 삶, 그 전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뜻이 여기까지 미치니 표지 모델 선정은 어렵기 짝이 없는 작업이다. 아, 여기에 시기성도 담보해야 한다. 아무런 이슈도 없는 인물을 뜬금없이 표지 모델로 선정하기에도 무리가 있으니 말이다.
이달도 <아레나>는 표지 선정에 곡절이 좀 있었다. 이 책장을 넘기고 있는 당신은 이달 표지 모델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도발하는 타란티노다. 엄지와 검지를 펼쳐 들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기를 전파하는 듯한 포즈를 취한 타란티노, 광인의 그것처럼 번득이는 눈빛의 타란티노. 앞서 말한 다각도의 이유를 들어 그가 표지 모델이 되는 건 반론없이 찬성이었지만 단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건 일 년에 단 한 번 8월호만큼은 여자를 모델로 한다는 <아레나>의 암묵적 원칙을 깨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작년 8월호 표지 모델은 지젤 번천이었다. 게다가 이달 특집 칼럼 역시 ‘sexy girls’ 아니던가.
생각이 복잡해진 나는 두 개의 시안을 제작했다.
그 첫 번째가 블랙과 레드의 강인한 조합을 앞세운 타란티노 편, 두 번째가 ‘섹시 걸’이라는 서체와 일심동체가 된 구릿빛 피부의 제시카 심슨 편이다. 전자는 무엇보다 압도적인 시선-혹자는 섬뜩하다 하지만-이 매력이었고 후자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섹시 걸 그 자체라는 데 점수를 줄 만했다. 각 시안에 있어 아쉬운 점도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타란티노 편은 더워 보이는 데다, 섹시 걸이라는 표제와의 조화가 어렵다는 게 그것이다. 또 제시카 심슨 편은 수십 종의 여성지 사이에서 빛을 발할 만큼 포스가 강력한가 하는 것과, 2007년 유일의 여자 모델일 수도 있는 우리의 ‘그녀’가 왜 심슨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에 있었다. 편집, 미술, 광고팀, 편집부를 들락거리는 외부 인사들의 의견은 정확히 반으로 나뉘어 나의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늘 그렇지만 칼자루는 내게 쥐어졌고 결국 나는 타란티노 편을 택했다. 이유는 본인이 타란티노의 광 팬이라는 데 있는 건 아니었다. 제2의 표지인 별책과의 조화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2개의 표지를 분권해서 보지 않고 하나의 조합으로 보았을 때 여자와 여자, 그것도 제시카 심슨과 로즈 맥거웬의 조합은 같은 옷을 두고 싸우는 시기심 많은 자매처럼 상당히 거슬린다는 점이 판단의 근거였다. 두 권의 책이 모두 <아레나>라는 제호 아래에서 달큰한 설탕물처럼 어우러져야 할 텐데 그런 의미에서 블랙 타란티노와 레드 로즈 맥거웬(그녀는 타란티노의 신작 <데쓰 프루프>의 주인공이다)은 썩 괜찮은 조합이니까 말이다. 뭐 굳이 두 개의 연작에 타이틀을 붙이자면 ‘미녀와 야수’ ‘타란티노와 그의 뮤즈’ 정도 되겠다. 그리하여 사진과 서체의 출중한 조합으로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었던 제시카 심슨 편은 수면 아래로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작가 이청준은 소설을 쓰는 일이 ‘젖은 속옷 제 몸 말리기’와 같다고 했다. 매달 마감을 털고(마치고가 아니라  툴툴 털어버린다는 말이 내게 더 맞다) 나면 나 역시 젖은 속옷을 입고 서 있는 듯한 찜찜함이 엄습한다. 오래 널어 말리고 풀을 먹여 각을 세운 셔츠의 깃처럼 빳빳한 기운이 먼저여야 할 텐데 말이다. 표지 필름을 인쇄소에 건네고 돌아서는 새벽길의 내 머리는 이미 손을 떠난 8월호를 부질없이 재편집 중이다. 하지만 대문호는 그 찜찜한 노릇이 참으로 가상스러운 노력이 아닐 수 없다고 글에 덧붙여놓았다. 하하.

p.s  못 다한 이야기 -별책 편-
침 발라논 죽이는 사진이 있었다. 에바 롱고리아의 누드, 환상적인 지젤의 각선미, 샤를리즈 테론과 스칼렛 요한슨의 반라… 기사와 사진 편집을 마쳤음에도 결국 책에 싣지 못하였다. 각 에이전트에서 별책이라는 이유로(아니, 왜?) 사진을 주지(아니 팔지) 않았고 혹은 입이 쩍 벌어지는 가격을 제시하는 통에 설전에 설전을 거듭하다 포기하기도 했다. 이 중 몇 컷은 <아레나> 과월 호에 게재되었던 것들인데도 말이다. 이렇게 허락과 허락을 반복해야 하는 유명 셀레브러티의 사진들이 매달 마감 일정에 차질을 주기도 한다. 맘 같아서는 확 다 빼버리고 싶지만, 당장 표지부터 백지로 나가게 생겼으니 어쩌겠는가. 매달려야지.

결국 못 다한 이야기
어쩌면 이달 표지가 될 뻔했던, 제시카 심슨 편(왼쪽). 취하지 못하면 더 애달픈 법. 별책의 표지 모델로 낙점했던 에바 롱고리아(오른쪽).

 

아레나 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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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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