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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소설 - 베이비

맛과 향이 술을 이루는 전부가 아니다. 이달 <아레나>는 다섯 명의 소설가에게 술이 환기하는 정서, 환영, 일상에 대해 짧은 소설을 써보자고 제의했다.

UpdatedOn August 27, 2013

베이비를 위한 밤
Liquor : Kirin Beer


장마가 시작된다고 했다. 태풍이 오고 있다고도 했다.
그녀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녀의 발이 내는 소리를 단박에 알아듣는다. 일종의 재주랄까. 얼른 문을 열었다.
그녀는 계단참에 멈춰 서서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한 손에 쇼핑 봉투를 들고 있었다. 며칠 머무를 작정인 듯 보였다. 그토록 재빨리 현관문을 연 것에 나는 벌써 후회하던 참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누워 지내고만 싶다고 생각했다. 밤새 폭우가 쏟아질 예정일 밤이라니까. 잠드는 데 아주 애를 먹을지도 모를 테니까.
생각은 틀려먹었다. 그녀가 냉장고에 이런저런 물건들을 집어넣으며 물었다.
“소파를 바꾸는 게 어때?”
“침대가 아니고?”
웃자고 한 소리였는데 그녀는 웃지 않았다. 괜찮은 소파를 봐두었다고 했다. 그것은 3인용이라고 했다. 굳이 다른 소파를 원한다면 1인용이 낫다고,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의 2인용 패브릭 소파는 아직 낡지 않았다. 게다가 2인용치곤 꽤 넓은 편이다. 다만 희미한 얼룩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 얼룩을 두고 더럽다고 말할 자격이 그녀에겐 없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든 얼룩이었으니까.

“봐둔 게 있다니깐!”
그녀가 소리를 빽 질렀다. 나는 열어둔 창문을 닫았다. 요즘 그녀에게는 툭하면 소리 높여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모양이라고, 3인용 소파를 갖고 싶은 게 아니라 2인용 소파를 버리고 싶은 거겠지,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나는 소파 위로 올라가 다리를 길게 뻗었다. 그녀가 뒤로 물러서는가 싶더니 내 다리를 발로 세게 찼다.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는 다리를 접으며 그녀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고개만 돌렸다. 거절의 신호였다. 나는 그녀의 제스처가 우스웠다. 리허설만 반복하는 여배우처럼 제스처만 반복하는 불쌍한 나의 연인. 그녀가 제대로 거절할 줄 아는 여자였다면 우리는 진작 헤어졌을까?

의외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비구름이 차츰차츰 몰려오고 닫힌 창문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부엌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눈여겨 바라보았다. 얇은 원피스 자락이 그녀의 허벅지에 달라붙었다가 이내 떨어졌다. 어느 밤 내게 안겨 있던 뒷모습, 나를 나쁜 애인이라고 생각하는 여자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베이비, 난 처음부터 나쁜 애인이 아니었어. 기억하지?

그녀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왔다. 내게 한 병을 건네고 남은 한 병을 손에 쥔 채 바닥에 앉았다. 그러고는 맥주 라벨에 적힌 글자들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기. 린.” 마치 그것이 이 밤에게 선사하는 이름이라는 듯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읽어 나갔다.
병 입구에 입술을 붙이고는 휘파람 불듯 “기, 린”이라고 한 번 더 말했다. 그리고 잔에 맥주를 따랐다. 기다란 유리잔 위로 거품이 넘쳤다. 그녀는 한껏 몸을 뒤로 뺐다. 치맛자락으로 대충 거품을 닦아내더니 다시 부엌으로 달려가 숟가락을 가져왔다. 그녀는 좀 전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거품을 가득 떠먹었다. 가끔 숟가락으로 컵 속을 휘휘 저어 거품이 새로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슬며시 웃었다.

나는 소파 빈자리를 손으로 툭툭 쳤다. 입술에 묻은 거품을 혀로 핥으며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팔을 길게 뻗었다. 그녀가 아주 느린 속도로 내게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만든 희미한 얼룩 위에. 그녀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거품이 컵 위로 둥글게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재빨리 컵에 입술을 갖다 댔다. 거품이 부드럽게 그녀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녀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붙이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에게 기회를 줄게.”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무슨 기회?”
“나를 취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
그녀는 한 손으로 소파 위를 짚고 몸을 뒤로 한껏 젖혀서는 나를 뜨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당장이라도 뭐라고 외칠 것 같은 표정이다. 나는 얼른 그녀의 손에 위태롭게 들려 있는 컵을 빼들고선 웃으며 말했다.
“이런 밤, 상상한 적 있잖아? 베이비?”

황현진(소설가)

Editor: 이우성
Photography: 안정환
ASSISTANT: 박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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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이우성
Photography 안정환
Assistant 박희원

2013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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