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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소설- 사라지는

맛과 향이 술을 이루는 전부가 아니다. 이달 <아레나>는 다섯 명의 소설가에게 술이 환기하는 정서, 환영, 일상에 대해 짧은 소설을 써보자고 제의했다

UpdatedOn August 19, 2013

조명은 알렉산드로 멘디니가 디자인한 라문 아물레또, 녹색 노트는 몰스킨.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Liquor : Jacob’s Creek


그녀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겨울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가을이었지만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에 사람들은 우왕좌왕했다.
거울 앞에 서서 코트를 꺼냈다가 입던 옷을 입고 거리로 나갔다. 추워진 날씨가 다시 제 모습을 찾을 거란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10월이었으니까, 10월은 적당히 서늘하고, 적당히 추워야 하는 것이 맞는 일이니까. 사람들은 사라진 10월을 다시 찾길 원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하루 대부분을 작업실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글을 쓰고 싶어 글을 썼으나, 도무지 아무것도 써지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낙엽이 순식간에 모두 떨어졌다. 앙상한 가로수가 쓸쓸하게 거리를 지켰다. 그녀는 산책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아무것도 쓸 수 없었으니까.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니까. 그녀는 걸어야만 했다.

그녀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노상 카페에서였다. 그녀는 아주 멀리까지 걸어가서 커피를 마시곤 했다. 하루에 한 번은 들르는 단골 카페였다. 가랑비가 내렸던가, 그녀는 살짝 한기가 드는 어깨를 움츠리며 카페에 들어섰다. “연우야.” 뒤에서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였고, 3년 만이었다. 둘은 그렇게 다시 만났다.

겨울을 함께 보냈다. 그가 주로 그녀의 작업실로 찾아왔다. 아주 가끔이었다. 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그를 다시 사랑하게 되었으니 쓸 이유가 없었다. 그를 기다렸고, 그가 찾아오면 떠나길 바랐다. 둘은 작업실에서 와인을 마시며 음악을 들었다.
그는 클래식을 좋아했고, 그녀는 블루스 음악을 좋아했다. “넌 왜 이것만 마셔?” “그냥, 색깔이 예쁘잖아요.”

짧은 사랑을 나누곤 작업실을 나서는 그의 굽은 어깨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겨울은 더디게 흘렀다. 슬그머니 봄이 찾아왔고, 그는 다시 떠났다. 아무런 작별의 말도 없었다. 그녀도 그를 찾지 않았다. 그를 기다렸던 시간 때문에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그녀는 가끔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거리를 산책했다. 혹시 그와 마주칠까봐 자주 가던 카페에 가지 않았다. 그녀는 더 멀리까지 걸었다. 여름이 오고 있었다. 윈도에 철 지난 겨울 스웨터를 입고 서 있는 모습을 보고서도 그녀는 봄이 가고 있는 걸 알지 못했다.
여전히 아무것도 그녀는 쓸 수 없었다. 그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스웨터를 벗고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었다. 한 계절을 건너뛴 것 같아 낯설었다. 매일 조금씩 뭔가를 끄적였다. 겨울이 되면 뭔가를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를 떠올려도 나쁘지 않았다. 햇살은 점점 강렬해졌고, 아스팔트 위의 열기는 감정을 무디게 만들었다. 그는 걷는 것 대신 자전거를 탔다. 페달을 구르는 소리가 좋았다. 그를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건 장마가 시작된 첫날이었다. 하늘은 잔뜩 찌푸린 채 비는 오지 않았고, 스산한 바람이 조용히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갔다. 그는 편의점에서 나오는 길이었고,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커피와 빵을 사러 가는 길이었다. “잘 지냈니?” 그의 낮은 음성이 울리자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당황했지만 곧 괜찮아졌다. 천천히 자전거에서 내려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차, 할래요?” 움푹 팬 보조개가 찐득한 날씨를 걷어내는 것 같았다.

차 마시자더니. 작업실은 지난겨울 그대로였다. “싫어요?” 와인 잔을 건네며 그녀가 말했다. “아니, 좋아. 이게 이름이 뭐였더라?” “제이콥스 크리크 샤르도네.” 그녀가 등진 채 코르크 냄새를 맡으며 말했다. “왜 이것만 마셔?” “처음에는 오묘한 빛깔이 예뻐서였는데, 지금은 음, 맛이 좋아. 뭔가 정리되는 느낌이야. 복잡했던 게 잊히는 느낌.” 둘은 음악을 들으며 말없이 와인을 마셨다. 그는 쇼팽의 피아노를 들었고, 그녀는 듀크 로빌라드의 기타를 들었다.

“자고 갈까?”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귀여워. 그녀가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가 그녀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이제, 그만 가요. 곧 큰비가 올 거 같아.” 그녀가 와인 잔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잘 지내.” 그가 작별을 하고 돌아섰다. “잘 가요.” 그녀가 그의 굽은 어깨를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녀가 마지막 남은 와인을 마셨다. 씁쓸하면서 달콤한 향기가 온몸으로 천천히 퍼져 나갔다.

백가흠(소설가)

EDITOR: 이우성
PHOTOGRAHY: 안정환
ASSISTANT: 박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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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이우성
Photography 안정환
Assistant 박희원

2013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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