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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정현민 작가

여의도의 아이콘

그는 여의도에 갈 때면 윤중로의 벚꽃보다 국회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정치인으로서의 색을 완벽히 벗지 못했던 그가 드라마 <정도전>의 성공을 발판 삼아 이제 막 작가로서 인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 2막.

On July 30, 2014


작가라고 해서 사전조사를 했는데 정치인 생활을 더 오래하셨던데요?
스스로 정치를 했다고 말하기가 부끄럽습니다. 그냥 정치권에서 10년간 정치가들을 보좌했다, 정도로 표현하고 싶네요. 제가 했던 업무에 대해 조금 말씀드리면, 저는 정무 파트보다 주로 정책 파트에 있었고 환경노동위원회에서 노동정책 담당이었습니다. 노동 전문가가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에서 노사관계를 공부했었답니다.

학창 시절은 어떻게 보내셨는지 궁금하네요.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 3학년 때 효성중공업 창원공장으로 실습을 갔었죠. 1987년 6월 항쟁이 벌어질 때만 해도 고등학생이어서 학생운동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첫 출근하는 날 공장의 유리가 다 깨져 있어서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사보에 재미 삼아 콩트를 냈는데, 그걸 본 노조 간부가 찾아와 노보(노조 신문) 편집위원을 맡긴 겁니다. 그 뒤에 <해돋이>라는 노보를 창간했어요. 그렇게 그 뒤로 자연스럽게 노조활동을 했지요.

하마터면 기자가 될 뻔했겠는데요?
그때 노보와 대자보를 한창 쓰고 있었는데 취재 나온 기자들이 너무 멋있어서 “기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니 “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가라”고 하더라고요. 그 뒤로 야간학원을 다니며 대입 준비를 해서 90학번으로 대학교에 입학했는데 감격의 순간도 잠시, 1991년 강경대 열사가 쇠파이프에 맞아 죽는 일이 발생했죠. 그래서 데모를 하기 시작했어요. 군대에 다녀온 뒤에는 IMF 외환위기로 취업할 곳이 없었는데 한국노동조합총연맹에서 함께 일하자고 연락이 와서 몇 년간 일했어요. 그러다 <매일노동뉴스>로 이직해 기자 생활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국회로 들어갔죠.


보좌관 시절 직접 모신 정치인들을 소개해주세요.
총 다섯 분을 모셨는데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두 분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박인상 노사발전재단 이사장이신데 부드러운 성품의 소유자이며 저에게는 양아버지 같은 분이세요. 노동계의 대부이자 진정한 리더시죠. 박 이사장님이 국회의원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 스태프들은 대부분 민주노동당으로 향했지만 저는 그쪽으로 가지 않고 한나라당으로 갔어요. 생계형 보좌관에게 무슨 정치적 성향이 있겠습니까?(웃음) 그때 이경재 전 환경노동위원회 상임위원장을 만났는데 노동 담당 수석보좌관으로 5년을 모셨죠. 그분은 정치적인 스탠스가 보수일 뿐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분이셨어요. 보좌관에게 절대 나쁜 일을 시키지 않는 분이셨죠.

어쩌다 보니 진보와 보수의 대표적인 두 인물을 모셨네요?
네, 흔하지 않은 경험이죠. 두 분의 스타일은 조금 다르지만 인성을 갖춘 리더라는 점이 공통점이죠. 박 이사장님 같은 경우 제가 마음에 맞지 않는 의원실에 들어갔다 그만뒀다는 얘기를 듣자 직접 수소문해 제 자리를 잡아주신 고마운 분입니다. 젊은 친구가 운동권 놈팡이 비슷하게 살아가는 게 싫으셨던 것 같아요. 또한 이경재 전 위원장님도 보잘것없고 나이도 어린 저에게 환경노동위원회 상임위원장의 수석보좌관 자리를 주셨잖아요. 저에게 전권을 주시고 최종적인 결정만 하셨어요. 당시 콤플렉스 덩어리였던 저를 사람으로 만들어주신 분들이죠.

KBS1 드라마 <정도전>에 등장하는 인물은 주인공부터 작은 배역까지 캐릭터가 잘 잡혀 있다는 평을 들었다.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과 정치 보좌관을 역임하던 시절이 잘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보좌관 시절 경험이 이번 KBS1 드라마 <정도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국회에 10년간 출입했고 대한민국에 내로라하는 분들을 만나봤으니 정치 사극인 이번 드라마를 만들 때 많은 힘이 됐죠.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호평 일색입니다.
사실과 허구, 몇 대 몇입니까? 5 대 5 정도로 봤습니다. 한동안 사극 드라마가 침체기를 겪은 것은 역사를 재현하기 힘들다고 판단되면 재미 위주로 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재미와 감동도 중요하지만 공익적인 측면도 분명 중요하잖아요. 사실과 허구를 5대 5로 보고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것이 제 목표였습니다. 그러려면 지켜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째는 ‘역사적 사건을 왜곡하지 않는다’, 둘째는 ‘인물의 아이덴티티를 훼손하지 않는다’였습니다. 그 이외의 부분은 각색을 약간 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각각의 캐릭터들이 생동감이 넘쳐요. 모티브가 있었나요?
‘이성계’의 경우는 제가 모셨던 박인상 이사장님의 포용하는 리더십을 녹여내려고 했습니다. ‘의인불용 용인불의’라는 말이 있듯 의리가 불분명한 사람마저 포용하는 분이시거든요. 삼봉하고 포은에게 전권을 맡기는 이성계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이죠. ‘정도전’은 아무래도 혁명가다 보니 그런 사람들의 생각을 알아야겠다 싶어 진보 운동의 대부인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느낀 혁명가들의 공통점은 의외로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문장도 수려한 편이고 또 눈물도 많죠. 체 게바라도 원래 시인이었잖아요. 그런 모습을 정도전에 투영하려고 했어요. 정치 고수 ‘이인임’의 경우 국회에 출입할 당시 많이 볼 수 있었던 3~4선 의원들의 모습을 참고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끌리는 인물은 누구였습니까?
이성계였어요. 아랫사람들을 믿고 일일이 다독거릴 만큼 덕을 베푸는 통 큰 사람인 반면 주사도 있고 시도 때도 없이 울고 욕하고…. 전쟁 영웅이라기보다는 입체적이고 인간적인 사람으로 그리다 보니 애착이 많이 생기더라고요.

드라마가 종영했는데도 인기가 식을 줄 모릅니다. 북한에서도 인기가 있다고 하네요.
사실 작업실 안에서 모든 의식주를 해결하다 보니 드라마가 그 정도로 인기 있는 줄은 몰랐어요. 종영하고 나서 여기저기서 인터뷰나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줄을 잇고 나니 ‘아, 드라마가 성공적이었구나’ 하고 느꼈죠. 저도 (북한에서) <정도전>이 인기 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역성혁명을 일으킨 장본인이 주인공인데도 그곳에서 인기가 있다고 하는 걸 보면 이런 일도 있을까 싶어요. 이런 게 작가로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인 것 같아요. 내가 만든 결과물이 지역에 상관없이 여기저기서 회자된다는 사실이 기쁘네요.

그는 눈을 감는 그날까지 함께할 것만 같았던 ‘정치’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필요했다. 어린 시절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꿈, 바로 작가였다.


10년간의 보좌관 생활을 그만두고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요?
드라마 <카이스트> <반올림>을 집필했던 인기 작가인 김윤영씨가 정치보좌관을 주제로 한 드라마를 계획 중인데 저를 취재하고 싶다고 찾아왔습니다. “원래 어릴 때는 글 쓰는 게 꿈이라 전태일 문학상에 출품해서 최종까지 갔었다”고 자랑했는데 김 작가가 “드라마 대본은 말하듯 쓰면 되니 보좌관님에게 잘 맞을 것 같다”고 얘기하더군요. 인터뷰이에게 흔히들 하는 덕담이겠거니 생각하고 2년쯤 지났을 때 보좌관 생활에 염증을 느끼는 저 자신을 보게 됐어요. 국회 근처에 한국방송작가협회가 있었는데 작가 교육 과정은 1주일에 한 번만 나가면 된다고 해서 힐링하는 마음으로 등록했죠. 그런데 매일 사람 사는 얘기나 ‘사랑’에 대해서 글을 쓰다 보니 심리적 안정을 찾았던 것 같아요. 그때 KBS 극본 공모 단막극 부문에 덜컥 당선됐습니다.

바로 작가로 데뷔할 생각이었습니까?
인턴 교육 과정을 거쳐야 해서 첫 3개월은 보좌관 생활과 병행했어요. 일주일에 한 편씩 제출하기만 하면 됐는데 뭔가 진짜 제대로 취재해서 쓰고 싶더군요. 그래서 아내를 불러서 얘기했죠. “내가 작가에 도전하지 않으면 왠지 후회할 것 같다. 딱 2년만 해보고 안 되면 2012년 총선 때 원래 자리로 돌아올게”라고 말이죠. 아내는 “당신은 무엇이든 하면 잘하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해봐라”라며 저를 믿어주더군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저 그때 진짜 모은 돈 한 푼 없었는데.(웃음)

아내와는 어떻게 만나셨나요?
당시 저는 이경재 전 한나라당 국회의원의 보좌관이었고 아내는 장향숙 전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의 비서관이었어요. 우연히 아내를 본 적이 있는데 왠지 느낌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장 전 의원실에 있는 수족관에 열대어들을 풀어 넣고 물 갈아준다는 핑계로 매일 놀러 갔답니다. 아내가 타준 커피가 맛있어서 “커피가 너무 맛있네요”라고 말하면 아내는 정말 진지하게 “믹스커피인데요?”라고 말했죠. 아, 이런 순수한 사람을 꼭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만난 지 백일 만에 장인어른을 찾아뵀죠. 그때 저는 집도 없이 오직 차 한 대만 있어서 아내의 가족을 설득하기 위해 모두 발언을 준비해 갔어요.(웃음) 장인어른이 제가 얘기를 시작하자마자 “그래, 결혼해라” 하셨고 3개월 후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당시 저희 커플의 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야의 만남’ ‘여야 단일화’였어요.(웃음)

1 2006년 5월 북한개성공단 시찰을 위해 경제협력협의사무소를 찾았다.
2 2008년 4월 의원실에서 일과 도중 동료보좌관들이 찍어준 사진이다.
3 2002년 10월 보좌관 시절 국회에서 찍은 정현민 작가의 모습.


데뷔 후 어떤 작품을 썼나요?
독립운동가의 삶을 묘사한 KBS1 단편 드라마 <자유인 이회영>과 주인공이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KBS2 미니시리즈 <프레지던트>를 했죠. 그 후에 KBS 드라마 스페셜을 4편 했는데 이때까지 드라마가 다 한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해 하마터면 총선을 준비하러 돌아갈 뻔했죠. 그다음 작품이었던 KBS1 아침 드라마 가 최고시청률 17.4%로 괜찮은 편이었고, 그것이 <정도전> 집필까지의 시간을 벌어준 셈이었습니다.

‘작가가 되는 것이 내 운명’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나요?
아니요. 잘될 것이란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걸요? 제 운명은 ‘노동’ 쪽이었죠. 데모를 안 하려고 해도 그쪽에서 불러주고 한국노총에서도 불러주고. 근데 이상하게도 드라마 작가가 되면 망할 것이란 생각은 안 들었던 것 같아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야 한다는 점에서 경험 많은 사람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아무래도 가장 대립적 인간관계라 할 수 있는 노사관계를 전문으로 활동했으니 비슷한 연차의 작가들보다 경험적인 측면이 조금 더 나았다고 봐요.

글을 쓰실 때 어떤 스타일인지 궁금합니다.
산만한 스타일입니다(웃음). 다른 사람들은 제가 시대극이나 사극을 주로 집필하다 보니 한자리에 앉아 꾸준하게 쓸 것이라 상상하던데 10분 쓰면 10분 노는 날라리 스타일입니다. 놀 때는 주로 드라마 홈페이지의 댓글을 보는데 약 10만 건이 올라와 있는 것을 거의 다 본 거 같네요. 보통 마감이 임박해야 잘 쓰는 스타일인데, <정도전>의 경우 이미 TV 전파를 타고 있는 상황인데도 안 써져서 정말 높은 데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그때 우울증까지 와 정말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드라마 시청률이 소폭이나마 상승하고 어찌어찌해서 15회 분량 정도 쓰고 나니 ‘앞으로는 잘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며 차츰 안정을 찾았습니다. 모 작가 선배는 이 바닥은 글 잘 쓰는 놈보다 독한 놈이 살아남는다고 얘기해줬는데, 진짜 공감하는 게 작가 생활을 하면서 멘탈 관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가장 고마운 사람들은 작업실에서 함께 집필했던 보조 작가들이에요. 제가 화내고 짜증 부리는 것을 다 받아주고 제 생일날 그동안 함께했던 순간들을 사진 앨범으로 만들어 건네주더군요. 얼마 전에 다함께 모인 자리에서 제가 ‘나만 이 영광을 누리는 것 같아 너무 미안하다. 연말 시상식 때 좋은 소식 있으면 너희 이름을 수상 소감으로 꼭 말할게’라고 했는데 오늘 미리 당겨서 얘기해야겠네요. ‘정지연,박주영! 정말 너희들 아니었으면 못 해냈을 거야. 고맙다!’

5년 차 작가로서 작가의 매력은 무엇입니까?
작가 1년 차 때였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자기 전까지 휴대폰에 전화 한 통 오지 않는 것이 너무 무서웠어요. 때론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 회식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부러웠고. 근데 작가 생활이 익숙해지다 보니 서서히 장점들이 느껴지더라고요. 과업이 없으니 오늘 일어나서 아무것도 안 해도 좋고, 내가 쓰고 싶으면 쓰는 거고. 모든 의사결정 권한이 나에게 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하며 부탁할 필요가 없더라고요. 또한 굳이 명함을 들고 다니며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거죠.

주로 아이디어나 영감을 받는 작품들이 있는지요?
재밌고 밝은 작품을 좋아합니다. 사람 죽는 장면이 많다거나 피가 낭자한 작품은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룡의 영화에는 웬만해서는 죽는 장면이 나오질 않죠. 작가 중에는 <터치>와

를 쓴 아다치 미츠루를 좋아하는데 울적하거나 기분이 나쁠 때 보면서 위안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의 영화와 만화책은 정말 1백 번 이상 봤더니 모든 장면이 생생히 기억나요.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밝은 느낌의 스토리가 샘솟는 편입니다.

작가로 데뷔한 이후에는 일부러 정치 쪽에 발을 끊었다. 혹시나 정계의 힘을 빌려 성공하려 한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정치계로 돌아가고 싶지만 지금은 작가의 삶에 집중하고 싶다.


보수적인 정치판에서 개방적인 연예판으로 넘어간 셈인데, 혹시 정치 관계자들의 시선은 어떤지요.
많이들 응원해주십니다. 그분들도 사람이라 탤런트나 배우에 대한 로망이 있으시죠. 대신 정치판을 떠날 때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각오로 하라”고 말해주신 분이 많았어요. 이번 드라마가 잘됐을 때도 그분들이 “정치판에서 놀던 애들은 뭐든 다 잘해”라고 하며 진심으로 축하해주시더라고요.

연예계에 텃새는 없었는지요?
연예계에서도 저 같은 이색 경력을 가진 인물은 거의 없으니 굉장히 신기해하더라고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정치권보다 이곳이 더 냉정한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국회는 대차대조표로 비교하고 누가 더 성과를 내는지 경쟁하는 곳이 아닙니다. 반면에 연예계에는 인기, 시청률 등이 존재하다 보니 철저히 성과 위주죠. 어떤 감독이 A라는 배우와 친하다는 이유로 A를 캐스팅하는 일은 없습니다. 실력이 없는 배운데 친분 때문에 기용했다가 작품이 망하면 바로 원수지간으로 돌아가는 곳이 바로 연예계입니다.

요즘도 정치가들이 연락하거나 다시 정계로 오라고 제의한 적 있나요?
한번 놀러오라고 연락들 하세요. 시간 날 때 강연회 한 번 해달라고도 하시고요. 제 생각에는 저에게 다시 (정치로) 돌아오라고 하실 분은 없다고 생각해요. 보좌관은 정치인들의 그림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소위 정치판에서 자주 쓰는 말인데 ‘비서는 입이 없어야 한다’고들 하죠. 정치인이 자신보다 유명한 보좌관을 쓰는 것은 뭔가 껄끄럽잖아요. 지난봄에 보조 작가들과 여의도 윤중로 벚꽃축제를 보러 간 적이 있는데 작가들이 “선생님, 벚꽃을 보셔야지 왜 국회를 보고 계세요?”라고 해서 알았어요. ‘아, 내가 아직 정치에 미련이 남아 있구나’ 하고 말이죠. 여전히 좋은 사람이 한번 같이하자고 하면 가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하지만 민폐를 끼쳐드리고 싶지는 않네요.

지난 6월 지방선거에 누구를 찍었는지 말해줄 수 있나요?(웃음)
그날 하필 대본이 펑크 나서 메우느라 투표를 하지 못했습니다. 국민의 기본권을 행사하지 않은 나쁜 사람입니다.

드라마가 대단원의 막을 내린 지금, 가장 하고 싶다고 벼르던 일은 무엇인가요?
작가 선배들이 좋은 드라마를 쓰기에는 제가 너무 건전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뭔가 더 색다른 경험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아직 잘 모르겠네요. 저도 처자식이 있어서 멀리 나가면 안 될 것 같은데 또 지금 아니면 한동안 못 나갈지도 모르겠고. 아무래도 해외여행을 한 번 다녀와야겠죠?

그렇다면 차기작은 해외 올 로케이션 시대극인가요?
해외 올 로케이션을 할 정도로 자금 지원은 안 되겠죠.(웃음) 1970년대 시대극이나 인물 심리묘사가 뛰어난 정통 정치 드라마를 하고 싶은데, 아마 사극을 한 번 더 하게 될 것 같아요. 만화가 원작인 작품인데 얘기가 잘된다면 아마 콘셉트 정도만 따와 새로 각색할 것 같아요.

시대극, 정통 정치 드라마, 그리고 사극. 과연 그의 다음 카드는 무엇일지 기대된다.

CREDIT INFO

취재
이충섭
사진
박원민, 정현민
2015년 11월호

2015년 11월호

취재
이충섭
사진
박원민, 정현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