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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향자 상무 상고 출신으로 삼성전자 첫 임원되기까지…

연구원 보조로 입사해 플래시메모리 설계 분야의 최강자가 된 삼성전자 양향자 상무. 삼성그룹 창사 이래 첫 여상 출신 임원이 된 양향자 상무를 만나 그녀의 인생과 성공 이야기를 들었다.

On February 21, 2014


아버지와의 약속 지키기 위해 실업계 학교로 진학
봉우리가 두 개인 산자락에 양씨와 정씨 2백여 명이 모여 사는 물 맑고 산 깊은 작은 마을 전남 화순군 쌍봉리. 이곳에 어릴 적부터 교수가 되기를 꿈꾸던 한 소녀가 있었다. 원래 꿈은 선생님이었는데 선생님 중에서도 가장 공부를 많이 하고 존경받는 사람이 대학교수라는 말을 듣고부터 교수로 꿈이 바뀐 것이다. 그런데 한마디 말로 인해 그 소녀의 인생은 전혀 다른 길을 향해 가게 된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실천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말, ‘내가 알아서 할게!’

“아버지가 폐가 안 좋아 항상 아프셨어요. 중학교 3학년 때 하루는 저를 부르시더니 오래 못 살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아파도 힘내라’고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아무 말씀을 안 하셔요. 그날따라 더 힘이 없어 보이는 아버지의 창백한 얼굴을 보니 어린 마음에도 왜 그렇게 안쓰럽던지. 아버지를 한참 바라보다 제가 한마디했죠. “내가 알아서 할게!” 그 말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아버지에게 큰 위안이 되었을까요? 그러고 나서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이 인문계 고등학교 원서를 실업계 고등학교(광주여상) 원서로 바꾼 것이었어요. 내가 알아서 남동생 둘을 잘 보살펴야 했으니까요.”

그때부터 아버지와 약속한 대로 ‘알아서 잘한’ 덕분에 삼성그룹 역사상 최초의 여상 출신 임원도 될 수 있었다고 웃으며 말하는 양향자 상무(삼성전자 디바이스 솔루션 부문 메모리 사업부 연구임원). 지금이야 어린 시절의 고단함이 추억의 한 자락으로 자리 잡았지만 당시의 상황은 어린 소녀가 받아들이기에는 힘든 현실이었다. 농사짓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광주 시내에서 장사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일과 농사를 도맡아했다. 오빠 두 명과 남동생 둘을 챙기는 것도 그녀 몫이었다. 더더욱 소녀를 좌절하게 만든 것은 원하지 않는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해야 했던 것. 학교생활이 생각했던 것과 달라 힘들었는데, 주말에 집에 돌아오면 대학생이 될 꿈에 부푼 고향 친구들을 보는 것 또한 고역이었다.

“그럴 때면 저녁에 아무도 없는 마을 다리 위에 올라가서 혼자 울었어요. 가족들도 힘든 상황인 것을 아니까 집에서는 티를 낼 수도 없었죠. 울면서도 ‘내가 알아서 할 거야’라고 다짐했어요. 실업계 학교에 갔다고 자포자기할 수는 없으니 나도 꿈을 가지고 공부를 열심히 하자고 마음먹었어요.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의 권유로 삼성전자 연구원 보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연구원 보조로 삼성전자 입사, 사내 대학에 입학
대학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현실은 취업을 택하는 방법뿐이었다. 연구원 보조는 말 그대로 대학을 졸업한 연구원들이 하는 업무를 돕는 것,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단순한 일들이었다. 매일 오전 7시에 출근해 복사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연구원들이 주는 반도체 회로를 도면에 그리는 단순한 업무였는데 회로를 그리면서 왜 저렇게 그리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반도체가 많이 발전했지만 당시는 일본의 기술이 훨씬 뛰어나 일본 선진 업체들이 출판한 일본어 기술서적이 많았다. 기술을 알려면 일본어부터 알아야겠다고 마음먹고 공부를 시작했다.

“평소에 매일 3시간씩 공부하고 주말에도 기숙사 밖으로 나가지 않고 공부했습니다. 공부하는 동안은 다른 생각을 안 하고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하니까 그게 더 좋더라고요. 3개월 동안 독하게 공부해서 제가 가장 먼저 일본어 자격증을 따냈죠. 일본어 잘하는 여직원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연구원들이 일본 서적을 가져와 번역을 도와달라고 하기 시작했고 다양한 자료를 접하면서 반도체 설계 업무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항상 ‘내가 나를 돕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에게 ‘끊임없이 배우겠다’는 약속을 하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주변 고수를 찾아가 묻고 또 물었다. 이해할 때까지 책을 보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며 공부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에게 기회를 주었다. 바로 사내 기술대학 반도체공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 물론 처음부터 쉬운 길은 아니었다. 여성은 뽑지 않는다고 해서 1년을 기다렸는데, 이번에는 여사원은 괜찮은데 여상 출신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담당자를 여러 번 찾아가 사정한 끝에 원서를 넣었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매일 오후 4시에 퇴근해 밤 9시까지 수업을 듣고 집에 와서는 그날 배운 것을 다시 복습하면서 피곤한 줄도 몰랐다. 그토록 원하던 대학에 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열심히 한 덕분에 졸업할 때는 함께 입학한 남자 직원들을 제치고 수석의 영광도 안았다. 양향자 상무에게는 그만큼 절박했던 것. 여상 출신이라는 편견과 싸워야 했고 새로운 업무를 습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공부해야 했다. 어쩌면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말이 갖고 있는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악바리 근성으로 열심히 한 덕분에 입사한 지 22년 만인 지난 2007년에는 메모리 사업부 D램 설계팀 수석 자리에 올랐고 그 이듬해에는 성균관대학교에서 전기전자컴퓨터공학 석사학위도 받았다.


후배들에게 이모로 불리며 직원 챙기기에 앞장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면서 옆에서 도움을 주는 선배들을 만나 이 세상이 혼자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는 경험도 했다. 그래서 항상 직원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후배들 사이에서 양향자 상무는 ‘이모’로 불린다. 따뜻한 마음과 시선으로 항상 후배들의 뒤를 지켜주는 든든한 이모 역할을 자처하기 때문이다.

“부장 시절에 중국 우한이라는 곳에서 결혼하는 중국인 직원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휴가를 낸 적이 있어요. 중국 사람이니 당연히 외동아들일 텐데 그 직원의 아버지가 어릴적 돌아가셔서 안 계신다고 하더군요. 제 아버지 생각이 문득 나더라고요. 이왕 중국에 간 김에 돌아가신 분을 대신해 제가 축사를 직접 읽었어요. 그동안 중국어 축사를 준비하면서 중국어 자격증도 땄죠.”

성공한 여성 리더인 양향자 상무에게도 결혼과 육아의 문턱은 높기만 했다. 1990년 결혼을 하고 첫딸을 임신했다. 그동안 전례가 없던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의 첫 임산부. 주변에서 ‘회사는 언제 그만둘 거냐’는 말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때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약속했던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말을 떠올렸고 이를 악물고 버텼다. 출산 전날까지 근무를 하고 딸을 낳았다. 아이를 부산 시댁에 맡기고 한 달에 한 번씩 보러 갔다. 훗날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아이가 눈에 밟혀도 꾹 참았다.

“아이 둘을 대신 키워주신 시부모님께는 항상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아이들 돌봐주시느라 결국 부산에서 수원으로 짐 싸 들고 올라와 주셨거든요. 덕분에 안심하고 회사 일을 할 수 있었죠. 사실 주변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없어요. 아이들 키우는 것만 해도 그렇죠. 시어머니와 동네 분들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아이 운동회에서 맨발로 달려 1등하기도
수원시 망포동에서 수민이(딸)·준성이(아들) 엄마라고 하면 웬만한 사람은 다 알 정도로 유명했단다. 물론 치맛바람이나 학원 정보통으로 유명했던 것이 아니라 방목형 엄마로 그 명성을 날렸던 것. 학기 초가 되면 양향자 상무는 아이를 데리고 학교 주변 식당과 분식점, 학원, 서점 등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이웃들에게 인사를 했다. 인사 끝에는 “이 아이가 찾아오면 먹을 것을 주거나 필요한 책을 주시고 공부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는 퇴근길에 들러 계산을 하고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들으며 아이들을 보살핀 것이다.

“물론 어린아이들이 회사 일로 바쁜 엄마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죠. 가끔은 투정을 부리고 떼도 쓰고. 적당히 받아주면서 일하는 엄마를 이해시킬 수밖에요. 함께 있어야 할 때 같이 있어주지 못하니 미안한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소풍이나 입학식, 졸업식 등 특별한 날을 제대로 못 챙겨주니 안타깝죠. 대신 운동회 때 점심시간 중에 학교에 찾아가서 ‘엄마 달리기’에 나가 1등을 해서 아이 마음을 달래준 적이 있어요. 정장 입고 구두를 신고 갔는데 구두 벗어던지고 맨발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달려서 1등을 했습니다. 진심은 통하는 법이죠. 환하게 웃는 아이를 보고 저도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달리기를 하며 즐거웠던 그 몇 분의 기억, 길지 않은 시간이 아이 머릿속에는 1년 동안 남는다고 했다. 아이가 정말 엄마를 필요로 할 때 아이 곁에서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주는 작은 정성이 중요하다는 것이 양향자 상무의 생각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고, 여기에 회사 일까지. 그야말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주변에는 자신보다 훌륭한 각 분야의 전문가가 많으니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언제든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말의 긍정적인 힘이 한몫했다.

“첫아이가 태어난 게 지금부터 23년 전의 일입니다. 그때 저는 사원이었어요. 다이어리에 앞으로 되고 싶은 직급을 적어놓았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그 바람이 현실이 되더라고요.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맞습니다. 몇 년 후 어떤 직급이 되고, 또 올라가고…. 제 목표를 적어놓은 것 중에 아이를 낳고 6개월 정도 잠깐 뒤처진 적이 있는 것을 빼고는 다 이뤄졌어요. 마지막에 임원에 해당하는 VP(Vice President)라고 적었는데 정말 상무가 되었습니다.”

메모리 제품 설계 자동화 추진을 통해 개발 기간을 단축한 공로를 인정받아, 남들보다 1년이나 빠른 발탁 승진이었다. 지금도 양향자 상무는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운동과 영어 공부를 하고 7시 반에 회사 업무를 시작한다. 처음 삼성전자에 입사했을 때 한 임원이 차를 타고 출근하는 것을 보고 나도 언젠가는 회사에 차를 가지고 출근하리라고 마음먹기도 했던 시골 출신 여사원이 임원이 된 것이다. 1천여 명의 삼성전자 임원 중 연구를 전담하는 여성 연구임원은 9명뿐이고, 그중 반도체 부문에서는 양향자 상무가 유일하다.

‘내가 알아서 할게!’ 덕분에 삼성의 별이 되다
“지난 12월 5일 임원 발표가 있었습니다. 제가 47세이던 해이고, 또 저희 아버지가 47세로 돌아가신 지 30년 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신문에서 제 이름을 발견한 순간 하루 종일 눈물이 나더라고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성공한 딸을 봤다면 정말 기뻐하셨을 겁니다. 삼성의 임원을 흔히 삼성의 별이라고 표현하는데, 제가 바로 그 별이 된 것이죠. 아버지는 30년 전 하늘의 별이 되셨는데…. 쌍봉리 출신 딸내미는 세상 떠난 아버지와 같은 나이에 삼성의 별이 되었네요. 이만하면 출세한 거죠?(웃음)”

양향자 상무는 얼마 전 어릴 적 강단에 서겠다는 꿈을 이루기도 했다. 물론 교수가 되어 정식 강연을 한 것은 아니지만, 삼성그룹 청년 토크 콘서트인 ‘열정 락(樂)서’의 2014년 첫 번째 강연자로 등장한 것이다. 자신의 어릴 적 처지와 비슷한 도서산간 지역의 중학생 1천5백여 명을 대상으로 강연했으니 어쩌면 교수보다 더 의미 있는 자리였을 것이다.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주제로 자신의 인생과 성공담을 이야기하며 가슴 벅찬 시간을 경험한 그녀. 양향자 상무는 강연을 통해 무엇을 하더라도 알아서 잘해내겠다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중학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하더군요. 고2인 제 아들 녀석도 그 말을 자주 합니다. ‘몰라’라는 말도 많이 하죠. ‘내가 알아서 할게!’는 귀찮아서 회피하는 말이 아닙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최선을 다해 직접 해내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젊은 친구들이 어떤 일을 하든 목표를 갖고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10년 후, 20년 후, 30년 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의지를 다진다면 세상에 못 할 일이 뭐가 있을까요?”

그녀의 이름이 ‘향자’인 것은 남자 형제가 네 명이나 되어서 남자들 사이에서 향기를 내라고해서 지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선견지명이 있는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남자 연구원들 틈바구니에서 지금껏 자신만의 좋은 향기를 내며 열심히 달려온 양향자 상무. 사람이 꽃보다 향기 나고 아름다운 이유를 그녀의 일과 삶에 대한 열정에서 찾을 수 있었다.

CREDIT INFO

기획
장은성
취재
박현구
사진
삼성전자
2014년 02월호

2014년 02월호

기획
장은성
취재
박현구
사진
삼성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