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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영혼

On April 20, 2012 0

버려진 고무호스, 곱게 감긴 밧줄, 입김이 담긴 풍선과 누더기로 붙은 면직물. 에바 헤세의 손끝에선 모든 것이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사소하고 흔한 것이 따뜻한 옷을 입는다.

가끔 어떤 이들은 이름만으로 마음을 들뜨게 한다. ‘어떤 사람일까?’라는 설렘이 생기고 마음속에 제멋대로 이미지를 상상하기도 한다. 에바 헤세라는 이름이 그랬다. 이 부드러운 음절의 조합은 ‘에바’로 환기되는 여성답고 우아한 이미지의 ‘헤세’라는 다소 문학적이면서 심미안적인 뉘앙스까지 풍긴다. 더구나 이름 앞에 ‘요절한 천재 화가’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으니 ‘대체 어떤 작품을 남긴 걸까’에 대한 궁금증은 너무도 당연하다. 살짝 고개를 돌린 그녀의 초상 사진은 타고난 ‘에바’의 모습 그대로였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선명하면서도 우울기가 깃든 눈망울, 길고 검은 머리카락은 예술에 대한 열정과 관능미마저 엿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 앞에서는 멈칫거리게 된다. 라텍스나 유리 섬유, 면직물 등으로 만든 그녀의 자질구레한 오브제는 그것이 일명 ‘부드러운 조각’으로 불리며 후대의 예술인에게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호하고 정의할 수 없는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다시 생각한다. 이 모호한 예술가의 생을 차분히 탐독한다. 모든 공명의 근원에는 이해를 위한 노력과 귀 기울임이 필요하듯 내가 에바 헤세라는 인물을 알기 위해서 그녀의 삶은 필독해야만 하는 권장 도서인 것이다.
에바 헤세는 유대인이다. 독일에서 태어난 그녀는 세 살 된 해 언니 헬렌 헤세와 함께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어린이들을 태워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탔다. 그녀의 가족은 뉴욕에서 재회해 미국에 정착했지만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받던 어머니는 정신 병원 신세를 졌고 급기야 그녀의 부모는 이혼을 하게 된다. 결국 그녀가 열 살 되던 해에 어머니는 자살을 하고 아버지와 새어머니 밑에서 지내던 그녀 역시 극심한 불안증에 시달렸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언젠가 버려질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가 어린 헤세를 괴롭힌 것이다. 매일 밤 아버지가 어린 딸을 침대에 묶어 재워야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불안증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 같은 유년 시절의 정서적 불안감이 그녀를 작가로 이끌었고 평생의 동력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알려진 대로 에바 헤세는 예일대에서 미술 수업을 들었으며, 이후 1961년 조각가인 남편 톰 도일을 만나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작가로서의 짧지만 굵직한 활동과 성취를 거둔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녀는 남편과 이혼하고, 세 번에 걸친 뇌 수술을 받았으며, 결국 1970년 서른네 살이라는 나이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뜨고 만다.


에바 헤세의 초기작들은 모호한 형태의 여성 이미지가 표현주의적 터치로 표현된 회화들이다. 결혼 후 뉴욕으로 건너가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이 초기 페인팅들은 어찌 보면 그녀 안에 깃든 내면의 흔들림이 고스란히 반영된 자화상이면서 화가로서의 자의식이 태동하고 성장하는 흔적이 담겨 있는 듯하다. 그리고 여기서 시도한 내면 세계의 반영은 1964~1965년에 그녀가 독일에 머무르면서 발견한 조형물에서 빛을 발하고, 이후 생의 마지막까지 물질과 형태를 향한 그녀의 작업은 풍부하고도 깊게 앞으로 나아간다. 풍선이나 고무호스, 그물과 밧줄을 활용한 에바 헤세의 오브제는 추상주의의 권위주의적 태도, 금속성의 쇳소리가 느껴지는 미니멀리즘의 차가운 특징이 지배하던 당시 미술계의 흐름에 든 반기였고 독자적인 새로움이었다. “나의 조형 어법은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알 수 없는 미지의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고백에서도 알 수 있듯 그녀의 작품은 모두를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무엇이기도 했다.
유대인이라는 근원적 공포, 부모의 이혼과 어머니의 자살로 이어진 유년 시절의 불안, 결혼과 이혼 그리고 병마와의 싸움. 34년 동안의 삶과 그중 10년이라는 예술가로서의 삶. 에바 헤세의 이력은 이렇듯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지만 그녀의 작품은 그리 간단하지도 만만하지도 않다. 10년간 집중적으로 토해낸 그녀의 언어는 예민하기도 하고 불안정하기도 하지만 충분히 둥글고 아름답다. 그녀의 작품에선 딱딱하고 권위주의적인 세상에서 홀로 웅크려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거, 혹은 부드러움이 담겨 있다. 사소하고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버려지고 구석의 폐허 위에 내동댕이쳐져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사물을 끌어들이고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는 모성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녀가 죽은 후에 많은 이들이 그녀의 작품을 조명하고 기리는 이유도 그것일 것이다. 에바 헤세와의 만남 그것은 분명, 기억에 남을 만한 이름을 가슴에 얹는 일이다. 그녀의 초기 페인팅과 후기 조형물을 만날 수 있는 개인전 <에바 헤세: 스펙트레스 앤드 스튜디오워크(Eva Hesse: Spectres and Studiowork)>는 국제갤러리에서 4월 7일까지 열린다.

editor KI NAK KYUNG
문의 국제갤러리(02-3210-9818)

Credit Info

월간 나일론

디지털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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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 NAK KYUNG
문의
국제갤러리(02-3210-9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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