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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의 빛과 얼굴

On March 02, 2012 0

네덜란드 회화가 우리나라를 찾았다. 사람들은 피곤한 얼굴로 노려보고 있고, 풍경은 마법에 걸려 꼼짝 않고 있으며, 정물은 데굴데굴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1 Koos van Keulen ‘식당’(2006).
2 Philip Akkerman ‘자화상 No.20’(2003).
3 Carel Willink ‘르네상스 복장의 소녀’(1945).


플랑드르라는 이름은 늘 회화와 함께였다. 브뤼겔의 마을 풍경이 그랬고 베르메르의 노란빛이, 렘브란트의 강한 명암이 그렇다. 풍경을 그리든 초상을 그리든 플랑드르라는 수식은 사실주의와 작가의 주제 의식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물은 또 어떤가? 오늘날 숱한 현대 정물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플랑드르의 정물은 온갖 꽃과 나비, 자연물과 인간적인 것이 한데 뒤섞였으면서도 공간과 주제가 전하는 깊이는 현대적인 무엇이었다. 서구적인 것보다는 어딘지 전통에 가깝고 유럽풍이라기엔 좀 더 변두리의 색채가 강하다. 사람과 자연의 ‘살이’가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친숙하고 거기에 담긴 색과 빛의 명암은 외려 이국적이고 차가운 그림들. 플랑드르 회화의 매력은 바로 이런 이중적인 것의 결합이 아닐까? 물주전자를 기울이는 여인의 앞치마에 스민 햇빛과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의 청춘의 눈, 편지를 읽는 여인의 먼 곳을 향한 사색. 베르메르 회화가 범부의 생활을 다루고 브뤼겔의 겨울 농가에선 금방이라도 눈무더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생생한, 아니 그보다는 좀 더 우수 어린 정적이 흐른다. 고백하자면 플랑드르의 회화는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생활의 감수성을 전해주고 있으며, 그 감수성 이면에는 북유럽의 백야가, 잔뜩 쌓인 눈무지의 고요가 잠자고 있다. 마냥 푸르지 않은 색채가 그렇고 마냥 꿈을 헤매지 않는 인물들이 그렇다.

플랑드르의 원소를 간직한 네덜란드의 회화가 잔뜩 관객을 찾는다는 소식이 반가운 이유는 바로 이것. 겨울의 끝자락에서 이 낯선 회화들을 통해 계절의 풍미를 아쉽지 않게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 미술관에서 4월 12일까지 열리는 <네덜란드의 마술적 사실주의: 전통에서 현대까지> 전이 바로 그것인데, 1920년대를 전후로 시작된 네덜란드 리얼리즘부터 최근 경향까지 살필 수 있는 약 80년간의 작품이 소개된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첫 세대 작가 캐럴 윌링크(Carel Willink), 윔 슈마허(Wim Schuhmacher), 딕 켓(Dick Ket)의 작품은 물론 최근의 네덜란드 구상 회화를 대표하는 필립 애커먼(Philip Akkerman)의 자화상도 포함되어 있다. 사실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표현은 남미 대륙을, ‘남미의 창세기’라는 거창한 이름표가 붙은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을 떠올리게 한다. 부엔디아 가문의 100년 역사를 때론 철저한 사실적 표현으로 거기 곳곳에 스민 기이하고 마술적인 사건을 그려낸 이 작품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신기루의 마콘도는 바람에 날아가 인간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며, 원고에 기록된 모든 것은 다시 되풀이되는 일이 없을 것이니 백 년 동안의 고독에 시달린 집안은 영원히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플랑드르의 옛 화가들, 사각의 액자 틀 안에서 영원히 잠자고 있는 그림들, 그 속에서 화면을, 풍경을 응시하는 누군가의 모습. 어쩌면 지상의 모든 회화는 신기루의 모래 언덕 속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이번 작품 앞에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표현을 더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돌을 씹어 먹고’, ‘하늘로 승천’하는 일 따윈 하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현대인의 어떤 고독과 그늘을 내비치고 있으며, 나무 탁자 위 잿빛 천 위에 널브러진 나뭇가지도 이미 죽은 것에서나 흘러나오는 침묵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풍경 역시 아련하게 잠든 것들의 이미지, 사람과 새소리가 사라진 정지된 그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이미 마술이 된 시간, 인물을 그려내고 있다.

4 Sylvia Willink -Quiel ‘카렐’(1982).
5 Koos van Keulen‘아잇제와 피사넬로’(2003).
6 Wim Schuhmacher ‘아디네 미스의 초상’(1942).
7 Barend Blankert ‘복숭아가 있는 테이블’(2006).
8 Peter van Poppe ‘친구의 초상’(1967).
9 Ellen de Groot‘한나와 단테’(2006년).

레이몬드 휘스만의 ‘부엌에서’라는 작품을 본다. 가는 금테 안경을 쓴 노인은 회색빛 머리칼이 생의 이력을 비춘다. 붉은 낯빛과 치켜세운 손가락은 여전한 생명의 활기를 드러내고 푸른 셔츠가, 부엌이라는 공간이 보편적인 시간 속에 있는 한 인물임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고 나는 저 보통의 초상에서 우리 역시 언젠가 저 노쇠의 길로 접어들 것임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쿠스 반 쿠오렌의 그림은 공간의 여백이, 인물의 구도가 인상적이다. 적빛 식당의 구석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흰 셔츠 입은 노인들, 각각 현대와 과거의 복식과 머리 스타일을 하고서 마주 선 여인들의 그림에선 시간을 흐르는 동질성, 차가운 응시를 본다. 사실 이 작품들에서 채도와 명도조차 일정한 벽, 배경은 비어 있다기보다 머무르고 있다는 혐의가 짙다. 화면에 등장한 사람들을 지금의 공간에 붙잡아두는 힘, 아무 말 하지 않는 틈 없는 벽은 실로 무서운 저력을 발휘하며, 그것은 그림을 응시하는 관객에게조차 동일하게 적용된다. 바렌드 블랑카트의 정물 ‘복숭아가 있는 테이블’, 아드리아나 반 조에스트의 ‘나뭇가지가 있는 병’ 등은 전형적인 정물화의 틀 안에 수직적 공간감을 더한 작품들. 정물의 요소가 된 오브제의 단순성은 얀 브뤼겔식 정물의 화려함과 거리가 멀지만 그렇다고 금욕적인 무엇을 드러내는 것 같진 않다. 외려 흑색 배경의 침투, 복숭아를 받친 흰 접시, 나뭇가지 꽂힌 철제통을 잠식한 그림자의 움직임을 잡아낸 것 같다. 정물에서 오브제가 아닌 배경으로 시선을 끄는 힘은 분명 플랑드르 정물화의 진화된 모습일 것이다.

윔 슈마허의 ‘아디네 미스의 초상’과 엘렌 드 그루트의 ‘한나와 단테’는 모로 누운 여인의 모습이 ‘마술적 한순간’을 드러내는 작품 중 하나. 은빛의 대가로도 불리는 윔 슈마허의 색채는 풍경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부드러운 상상력에 불을 지피고 독서에 빠진 한나의 단정한 머리칼과 벨벳 드레스, 저 분명한 눈빛은 단테의 문장 속으로 함께 들어가자는 손짓과도 같다. 피터 반 포펠의 ‘친구의 초상’도 빠질 수 없다. 검은 머리칼 옆으로 귀처럼 솟은 흰색 민들레의 리듬감과 옷에 새긴 무늬는 서로 조화를 이루며 무한한 자연, 상쾌하고 발랄한 야생의 생기를 그대로 전한다. 물론 미소를 띤 어떤 ‘친구’의 또렷한 눈동자가 지속적인 스타카토가 되어. 이제 이 네버랜드, 네덜란드의 마술적 세계에 뛰어드는 일은 각자의 몫이다. 마법의 세계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editor KI NAK KYUNG

문의 서울대학교 미술관(02-880-9508)

Credit Info

월간 나일론

디지털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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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 NAK KYUNG
문의
서울대학교 미술관(02-880-9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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