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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렁 슬렁 북촌 기행

On October 28, 2011 0

걷는다. 북촌을. 계동길로도, 가회동으로도, 원서동으로도 간다. 살이의 반복에 허기가 진 날.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낄낄거리다 문득 싸한 마음일 때. 향한다. 거기. 북촌 방향으로.


모처럼 햇빛 쏟아지는 날들이다. 주머니에 손 찌르고 어슬렁거리기 좋은 날씨다. 방향은 북촌. 간만에 선보이는 홍상수의 흑백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까닭이다. 영화 속 그네들은 겨울 외투 여미며 5일간 북촌에서 모이고 흩어졌지만 때 이른 계절이니 혼자가 낫겠다. 술자리의 농이 깔깔거림을 만들고 밀어의 눈빛들이 두서없이 부딪치는 찰나로 가득한 이야기였지만 괜스레 그럴 필요 없다. 삶의 끊임없는 반복, 거기서 느낌표를 만들고 물음표에 저어하는 나름의 일상만으로도 충분히 권태롭고 삐걱이고 있으니까. 이번엔 그저 북촌을 걷는 ‘행인 1’로 존재하는 거다.

듣자 하니 북촌이라는 이름은 조선 시대 한양의 중심이던 종로와 청계천의 윗동네라 하여 붙은 것이란다. 해서 지금의 종로구 가회동, 계동, 재동, 삼청동, 원서동, 팔판동 일대가 모두 북촌이라고. 살펴보면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동네라는 얘긴데 궁의 옆자리였으니 배산임수의 지리적 꼼수는 물론, 그 옛날 왕족이며 권문세가들 사대부 양반들이 득의만만하게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이 남산골 ‘허생원’처럼 가난한 몰락 양반은 아니었던 터라, 주변에 들고 나면서 세간을 처분하기 위한 골동품 가게들(지금의 인사동)이 형성된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1920년대 형성된 크고작은 살림집이 지금의 한옥 밀집 지역으로 남고, 1960~70년대, 강남 지역의 개발 붐으로 도시의 중심을 내어주면서 차츰차츰 배어든 고즈넉한 분위기는 지금의 북촌을 만든 일등 공신이다. 안국역을 빠져나와 재동슈퍼 앞 사거리에 다다르면 고민이다. 오른쪽 재동초교 쪽으로 빠져 계동길을 걸을 것인가 왼쪽의 정독도서관과 아트선재를 기웃거리다가 삼청동길로 접어들 것인가 아니면 곧장 가회동으로 직진할 것인가. 삼청동길은 조금 지겹다. 버섯탕수육을 팔던 곧잘 가던 중국집도 사라져버렸고, 무엇보다 주말이면 너무 북적인다. 상점들도 부쩍 늘어 예전의 과묵한 멋이 없어졌다. 가회동 한옥길은 해 질 녘쯤 올라가 해바라기하면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계동 쪽. 전광수 커피집의 향이 코를 간질이고 최소아과의원의 옛스러운 간판이 인사말처럼 반겨준다. 샛노란 오이꽃, 꽃 진 자리에 열매가 주렁주렁한 먼지 낀 상점 간판이 눈에 띈다. 알록달록한 디자인에 마음이 끌려 문을 열고 들어선 곳엔 익숙한 얼굴이 작업 중이다. ‘이사 오셨어요?’ ‘네, 삼청동은 너무 복잡해져서요.’ 오래전 삼청동 초입에서 목걸이며 귀고리를 만들던 주인장이 두 달 전부터 이곳으로 작업실을 이전했단다. 개업 선물이라며 부인이 만든 손비누를 건네고, 나 역시 반가운 마음에(핑계지만~) 목걸이 하나 사서 걸치고 나온다. 바로 옆에는 예사롭지 않은 입간판이 있는 파스타집이 보인다. 이름 하여 이태리 면사무소. 긴 치마 나풀거리며 재빨리 서빙을 즐기는 주인이 탁자 몇 개 놓고 맛 좋은 파스타를 판다. 현대사옥이며 출판사도 제법 있는 동네라 식사 시간 무렵이면 언제나 성업을 이룬다. 마음 맞는 친구랑 수다 떨며 포크 돌리기에 제격이다.


언덕 끝의 중앙고등학교까지 그리 길지 않은 길이지만 눈 돌릴 데가 제법 많다. 중간 중간 골목으로 빠지면 게스트하우스도 있고 빼곡한 한옥길 사이사이 한지공방, 옻칠공방 등 전통 공방도 숨어 있다. 노란벽작업실 같은 개인 작업실도 심심찮다. 계동커피, 다방 등의 심심하고도 담백한 이름들이 가만히 반겨주는 곳도 있고, 대구참기름집, 40년 넘은 대중탕인 중앙탕 등은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디선가 웅웅거리는 울림 소리로 아버지와 아들이 주고받는 이야깃소리가 들린다. 귀 기울이니 중앙탕 안에서 부자간에 오가는 말소리다. 만해당으로 꺾이는 골목 초입에서 우연히 귀동냥한 목소리가 주는 아득함이란…. 이곳이 아니면 추억 속에서도 찾기 힘든 소리의 기억이다.

계동에서만 4년째 꽃집을 하는 박사임 씨의 살롱은 그날그날 꽃도 풀어놓고 자작나무 패널에 전시도 곁들이는 이색 공간, 문 밖에 잘 꽃은 꽃병을 놓고 햇빛 속에서 사진을 찍으며 머뭇거리는 그녀의 뒷모습은 잘 말린 국화처럼 소담하고 어여쁘다. 간판도 내걸지 않은 이름 없는 옷 가게. 여주인 다람쥐 씨는 호주 사람이면서 동남아풍으로 그림도 그리는 남편과 함께 얼마 전 계동으로 흘러들었다. 여행을 좋아해 세계 각지에서 그러모은 그녀의 물건(?)들은 소복이 쌓인 틈에서 고르는 재미가 있고 미소만 서로 잘 섞는다면 값을 깎고 덤으로 얹어주는 인심은 저절로다. 계동길 끝, 중앙고등학교에서 오른쪽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참새 떼가 자주 내려앉는다. 소망피아노 집에서 새어나오는 아장아장 연주 소리에 맞춰 햇빛도 좀 놀다 가는 곳이다. 그 길을 따라 다시 내려가면 어느쯤부터는 원서동.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 생가를 마주하며 간만에 머리를 좀 하신 수건 쓴 동네 아주머니들이 구경하고 가는 패브릭 집도 눈짓으로 볼 수 있는 모퉁이엔 ‘커피맛이 멜로의 커피맛이 멜로우 사는 맛이 멜로’라는 캘리그래피 간판으로 고개 갸우뚱하게 만드는 작은 카페가 있다. 1년 전쯤 자리를 튼 이곳의 특징은 곳곳에 담긴 부부의 디자인 감각. 옛 가게의 바닥을 매만진 향수 어린 바닥과 소금칠을 해 부식시킨 창틀, 살짝 매달린 흑백의 결혼 사진까지, 작은 가게 하나에 정성을 들인 부부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카페인이 부담스러운 이들을 위해 찬물에 천천히 커피를 내리고 과일 등을 곁들여 만든 차갑고 투명한 음료병을 앞에 두고 천천히 옛 화가의 생가를 소나무의 매무새를 훔치고 있자니 주인의 말마따나 눈 내리는 겨울에 하릴없이 앉아 있으면 딱 좋겠다.

창덕궁 담을 따라 원서동을 훑고, ‘동네’ 커피집도 지나고 빈티지 조명과 소품을 파는 가게도 지나 한정식집 용수산에서 턴하고 내려가면 다시 계동길이 시작된다. 슬슬 산 아래로 떨어지는 해가 걱정이니 발길은 가회동 31번지. 북촌8경이라 이름 붙인 갖가지 길 중 즐비한 한옥길 이미지로 유명한 골목이다. 아니나 다를까. 돈미약국에서 꺾여 대장장이 화덕피자를 지나 시작된 초입부터 사람들이 심심찮다. 일본인, 중국인 관광객도 많다. 한적한 골목 사진을 찍고 싶다면 기념사진 대신 찍어주며 좀 기다려야 한다. 그 길은 뭐 한 번 슝 하고 올라가서 길 건너 종로며 남산타워를 대충 보고 내려오면 된다. 눈썰미가 좀 있다면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물 한 모금 들이켜며 노을 내리는 도시를 볼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서서히 구름이 물들고 야경이 올라오는 풍경, 낮이 물러가고 밤이 들어차는 모습을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는 곳도 많다.

야청빛 하늘이 자리를 잡은 후, 문제는 길 끝을 돌아 삼청동 쪽으로 내려갈 것이냐 다시 돈미약국 쪽이냐다. 왜? 출출하니까. 개인적인 코스는 이태리에서 공수해온 화덕에 구운 고르곤졸라에 아사히 한 잔 아늑한 불빛 아래서 나눌 수 있는 쪽이다. 어쩌면 다시 계동으로 방향을 틀어 번데기튀김을 상추와 깻잎에 싸서 먹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술술’로 향하고 있을지도. 문제는 방향. 이 외로움빨 날리는 가을에 북촌의 어느 방향이냐는 것이다.

editor KI NAK KYUNG

사진 KIM JEONG 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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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 NAK K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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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JEONG HO

201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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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 NAK K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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