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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자를 위한 안 내 서

On October 14, 2011 0

가을볕에 잘 말린 뽀송뽀송한 이불을 둘둘 감고서 만화책을 읽는다. 쳇바퀴에서 벗어나 숨 좀 돌리고 간만에 낄낄대다가 뭉클, 소금기도 쫙 빼고 나니 나른하다. 달콤한 휴일, 여전히 좀 모자라게 마련인 어른들을 위한 만화 6편이 있어 다행이다.

아스테리오스 폴립 … 데이비드 마추켈리
2010년 아이너스에서 최고의 작품상, 최고의 작가상, 최고의 레터링상을 수상하고, 2011년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특별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는 등의 나열로 이 작품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던 중년의 건축가가 오십 번째 생일날, 자신의 지난 인생과 결별하고 운명적인 여행을 떠나간다”라는 문구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단숨에 읽기에는 눈호흡이 안 따라주는 책, 웃기보다 정색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위한 책. 이 정도라면 설명이 좀 되겠다. 아스테리오스 폴립, 평생 태어나기 직전 생사의 갈림길에서 버림받은 쌍둥이 형제를 의식하며 살아온 이 남자의 이야기는 만만치 않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젠체와 논리적 질서로 무장한 의식의 겹 너머를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거기엔 발설하기 힘든 상처가 웅크리고 있고, 정체를 밝혀 대면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하다.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그걸 알기까지 50년이 걸렸다. 그의 표현대로 ‘주름 한 점 없이 깔끔하게 착 겹쳐졌다’는 아내와의 결혼 생활도 밑바닥을 걸어야 했다. 서로가 서로의 심연에 가 닿기까지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를 염탐하고 돌아와야 하는 여행. 이 쉽지 않은 길 위에서 그는 독하게 살아남았고 운이 좋았다. 그가 꽁꽁 얼어버린 몸으로 도착한 그곳에는 말없이 난로를 켠 채 앉아 있는 오랜 그녀가 있었으니.

염소의 맛 … 바스티앙 비베스
소년은 수영장에 가야 한다. 척추옆굽음증을 앓고 있는 그에게 물리치료사가 내린 처방이다. 소년은 친구에게 전화를 한다. 같이 수영장에 가자는 얘긴가 본데, 호응이 시원찮다. 결국 혼자 가야 한다. 수영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고 의무적인 방문이니 얼마간은 모든 게 낯설다. 집중도도 떨어지고 그저 흘끔흘끔 사람들을 의식하고 쳐다보고 관찰한다. 중간 중간 쭈뼛거리며 레일을 돌지만 그냥 돌 뿐이다. 그러다가 소년은 소녀를 만난다. 근사한 외모에 수영도 꽤 잘한다. 그녀는 소년에게 제대로 수영하는 방법도 알려주고 자세도 교정시켜준다. 물속에서, 물 밖에서 수영장의 푸른 물, 염소의 맛을 함께 나누며 그들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소년은 차츰 수요일의 수영장을 즐기고 마음에 들어 한다. 어느 날, 소년이 숨 한 번 쉬지 않고 이쪽에서 저쪽까지 잠영을 하고 싶다고 한 날, 소녀는 물속에서 무언가를 말한다. 소년은 알아듣지 못한다. 그녀는 뭐라고 한 걸까? 소년은 수요일마다 소녀를 기다린다. 오지 않는 소녀를 기다리며 수영을 하고 잠영을 하고 염소의 맛에 익숙해진다. 그렇게 소년과 소녀의 만남은, 어떤 생의 순간은 물기가 마르듯 서서히 미끄러져 사라진다. 2008년 앙굴렘에서 ‘올해의 발견 작가’상을 수상한 바스티앙 비베스의 <염소의 맛>. 그의 만화에는 이처럼 물이 튀고, 햇살이 쏟아지고, 몸이 흐르듯 감정이 흐른다. 전작 <사랑은 학살>, <폴리나>도 출간 예정이라는 소식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보면 <염소의 맛>은 충분히 달고 진하다.

토리빵 … 토리노 난코
‘그저께는 비가 왔고 오늘은 맑았다. 오늘은 최고의 고사리 캐기 좋은 날’이라고 중얼거리며 새벽부터 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고 비닐봉지를 챙기는 주인공이 있다. 개똥지빠귀, 곤줄박이, 동박새, 직박구리 등 모르는 새가 없고 모르는 새를 위해 집 안 곳곳에 빵 부스러기와 물을 놔둔다. 오렌지도 반으로 잘라놓고 사과 한 알도 먹기 좋게 꽂아놓는다. 새들을 관찰하고 꽃과 나무에 관심이 많고 모든 자연에 신경을 쓰는 인물이다. 잘게 부순 빵을 물고 가는 참새들을 보면 저녁 찬거리를 사서 돌아가는 어머니가 연상돼 좋아한다는 대사, 비가 멎은 직후의 나무는 새들이 신선한 물을 바로 마실 수 있어 좋고, 단풍나무처럼 잎이 가는 나무 밑에 가면 샤워도 가능하다는 관찰력을 보니 짐작이 된다. 그의 사소한 ‘작은 것들 사랑 일기’를 보면 나 역시 사소해질 것이며, 그 사소한 것들이 주는 기쁨으로 한 달은 넉넉히 낄낄거릴 수 있음을.

초속 5000 킬로미터… 마누엘레 피오르
작가는 이 책이 기본적으로 노마디즘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결코 무시하지 못할 지리적 ‘거리’를 사이에 두고 한 번도 무시해보지 못한 젊음과 나이 듦의 ‘거리’를 실감하는 이들은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초속 5000킬로미터’의 속도로 지나가버리는 과거가 지금의 나를, 내 등에 짊어진 추억을 얼마나 상하게 하는지를. 사춘기적 호기심으로 시작한 사랑에 생애 내내 끌려다니는 피에로와 루치아, 첫사랑의 찰나를 문득 떠올리고 연민하는 남자 그리고 여자, 떠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아내 또는 남편, 과거에서 한 치도 자유롭지 못한 사랑과 우정의 실체. 한껏 감성적인 수채화로 완성한 그림의 맛도 맛이지만,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우수의 풍경들은 이 만화가 올해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최고작품상을 수상하고, 이탈리아에서 최우수만화상을 수상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완성도를 짐작할 수 있다. 시간과 추억, 이 아득한 깊이에의 강요를 만나고 싶다면 이탈리아와 노르웨이, 이집트를 오가는 이 책으로 대신한다.

울기엔 좀 애매한 … 최규석
‘만화 안 내는 출판사’에서 만화를 내는 뭔가 애매한 만화가로 지내고 있다는 작가 최규석의 만화가 이렇게 찡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고등학생들이 나온 이야기로 말이다. 사실 그 시절은 역시 뭔가 좀 애매하다. 대신 사는 인생처럼 억지로 통화한 시절이었고, 성장통을 온몸의 감각으로 의식하며 살았고, ‘입시’라는 두 글자에 밑도 끝도 없이 기죽어 있던 때라 그럴까? 그 터널을 지나온 후로 한 번도 마음 편히 추억해본 적도, 애써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본 적도 없다. 한데 이 책 읽고 저릿한 걸 보니 이제 때가 된 것 같다. 어머니의 팍팍한 생을 어설프게 느끼고, 가계의 가난이 학원비, 등록금, 용돈 따위로 가늠되던 시절이 어떤 면에서 거룩하게도 보인다. 진한 말 몇 구절 남긴 이 책을 덮고 나니 그 시절 다시 만나 악수하고 싶다. 등 돌려 우는 얼굴 가만히 감싸주고 싶다. 삶은 온통 애매한 것투성이라고 귓속말해주고 싶다.

모베러 블루스 … 재수
음악으로 인생의 진로를 정하고 쉽지 않은 길을 걸어온 어느 뮤지션의 고백처럼, 이 이야기는 진짜 어른들의 일상에 어떻게 애초의 꿈이 끼여들고 펼쳐지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너무도 쉽게 허영이라 치부해버리는 꿈이 제자리를 찾는 과정, 자연스럽게 일상과 조화를 이루는지에 대한 소묘다. 다소 투박하지만 진솔한 대사와 대담하게 전개되는 구성도 볼거리. 지금 우리가 연주하는 있는 곡은 무엇일까? 우리는 사실 어떤 곡을 연주하고 싶었던가? 궁금하다면 어느 샐러리맨의 트럼펫 소리를 따라가야 한다.

editor KI NAK KYUNG
사진 KIM JEONG HO
어시스턴트 KANG HYE YOUNG

Credit 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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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 NAK KYUNG
사진
KIM JEONG HO
어시스턴트
KANG HYE YOUNG

2011년 10월호

이달의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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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 NAK KYUNG
사진
KIM JEONG HO
어시스턴트
KANG HYE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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