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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라서

On July 01, 2011 0

뜨거운 햇살에 아찔해지기도 하고 목구멍까지 치미는 나른함에 자꾸 눈이 감겨오는 여름이라서, 그런 여름이라서 문득 이 영화가 생각났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1991) 대학생 때 나는 과제도 안 하고 나가 놀지도 않고 매일같이 일본 문화원에 가서 옛날 일본 영화를 빌려봤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는 그때 본 일본 영화 중 하나다. 추운 겨울밤에 적막한 아파트의 침대에 앉아 혼자 이 영화를 봤다. 나는 아주 추운 곳에 머물고 있었는데, 영화 속에는 한적하고 따뜻한 바다와 서핑보드가 있었다. 특히 남자 주인공인 시게루가 단단하고 넓은 어깨를 활짝 펴고 서핑보드를 한쪽에 낀 채 바다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은 달려가서 그의 품에 안겨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대롱대롱 매달려보고 싶을 만큼 견고하고 튼튼해 보이는 팔과, 검게 그을린 피부와 굵직한 선으로 이뤄진 외모를 보고 있자니 루이스 가렐을 볼 때만큼 가슴 설레었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시게루는 어느 날 길에서 망가진 서핑보드를 발견하고 그날부터 매일 바다로 나가 서핑 연습을 하기 시작한다. 덕분에 영화를 보는 내내 바다를 실컷 볼 수 있고, 사람들의 목소리보다 바다의 파도 소리가 더 많이 들린다. 여자친구로 등장하는 오시마 히로코는 아라키 노부요시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기모노를 입은 여인만큼이나 기묘하고 예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시게루가 바다에 나가 서핑을 할 때 조심스럽게 그의 옷을 개어놓고 모래사장에 앉아 그를 바라볼 때의 그녀는 아라키 노부요시의 사진을 처음 봤을 때만큼 기억에 남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인상적인 건 이 영화의 감독이 기타노 다케시라는 거였다.
이상희(<나일론> 피처 어시스턴트 에디터)

안경(2007) 여름이면 사쿠라가 만드는 빙수를 맛보기 위해서 남쪽 바다로 가야 한다. 몰디브 같은 바다 색깔 때문이 아니라 몇 계절 잃어버린 사색을 위해서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 <안경>은 몸과 마음의 배터리가 방전된 어느 한여름밤, 더운 마룻마닥을 아주 시원하고 기분 좋게 만들어준 영화다.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 하얗고 빳빳한 리넨 시트에서 게으른 얼굴로 상쾌한 아침을 맞았으며 조용한 바닷가에서 아침 체조를 하기도 했고, 햇빛에 탈색될 것 같은 반짝이는 마을 어귀 한 귀퉁이에서 마음껏 사색을 했다. “사색을 하는 방법이 있나요?” 여자 주인공 타에코의 물음에 ‘도대체 우리는 왜 이 도시에 버려졌을까?’라는 절망적인 마음이 들통난 것 같아 마음이 서글프다. 함께 있어도 외로운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꾸 변했다는 이야기만 반복한다. 사색이라는 단어조차 꺼내기 힘든 관계와 나날들. 흘러가버린 것들을 위해서 <안경>의 섬사람들은 습관처럼 사색을 한다. 말을 많이 하지도, 서로에게 비밀을 털어놓지도 않지만 나란히 앉아만 있어도 그들은 서로를 채워주는 완벽한 존재로 보인다. “무엇이 여기 있는 걸까요? 아무것도 없어서 좋을지도.” 타에코는 섬에 오기 전까지 지구 같은 건 사라져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남쪽의 섬을 찾아왔지만, 막상 섬사람들의 비현실적인 태도에 당황하던 그녀는 차츰 활력을 찾아간다. 한낮 바닷가에 앉아 빨간 뜨개실을 엮기도 하고 가만히 앉아 맥주를 마시기도 하면서. <안경>을 보다가 난 여름날의 막막함을 벗어던졌다. 주인공들이 나누는 현실감 없는 대화마저도 사랑스러웠다. 비록 대책 없는 비현실주의자라 불린다 한들 잠깐만 눈을 감아보련다. 나른하고 지루한 꿈일지라도 그 자유가 이 막막한 여름밤을 견딜 약간의 재능을 심어주겠지. 김수진 (<스타일H> 피처 디렉터)

백만엔걸 스즈코(2008) 이 영화를 여름 영화로 명명하는 이유 중 80%는 빙수에서 기인한다. 스즈코는 독립해 살려다가, 룸메이트와 다툼 끝에 전과자가 된 소녀다. 언뜻 스즈코와 빙수의 함수관계는 요원해 보이지만, 그 사정을 추적해보면 이렇다. 오해로 전과자가 된 스즈코는 ‘프리터(freeter)’의 삶을 택한다. 프리터족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유롭게 생활하는 젊은이들을 일컫는 부류니, 남의 시선을 피해 살고 싶은 스즈코에겐 딱 좋은 선택이지 싶다. 스즈코의 목표는 좀 괴짜스러워서 ‘백만 엔을 모으면’ 다른 직업을 찾아, 전혀 낯선 곳으로 떠난다. 스즈코가 처음 간 곳이 바닷가 매점이고, 빙수는 그곳의 주력 상품이었다. 처음, 스즈코가 빙수 분쇄기에서 얼음을 갈아 종이 그릇에 담고, 빨간 시럽을 담는 과정을 선보이자 상점 주인은 그녀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스즈코는 빙수 만들기의 천재!”라고. 재능을 따지기엔 매점에서 판매하는 값싼 빙수 만들기 공정은 너무 쉬워 그 대사 자체가 당황스럽고 우스꽝스러울 지경이다. 물론 백만 엔을 모은 스즈코는 바닷가 빙수 만들기를 그만두고, 산으로 가서 복숭아 따기에 도전하기도 하고, 도심의 꽃집에 가서 판매원으로도 일한다. 수확철의 복숭아 따기나, 초록이 우거진 화원의 일 모두가 빙수만큼이나 한여름의 햇살과 잘 어우러지는 아이템이다. 물론 이 여름은, 아직 어른으로서의 확고부동한 가치를 정립하기 전의 소녀 스즈코에겐 고통스러운 자기 성찰의 과정이다. 스즈코의 여름 아르바이트는 계절 탓으로 조금은 발랄하게 포장되어 있음에도 아오이 유우의 상큼한 이미지만으로 상쇄되지 않는 끝없는 고민과 고충거리를 안겨준다. 마치 스즈코의 성장의 단면을 들여다보는 듯한 다채로운 여름. 빙수의 색다른 맛을 보고 싶다면 <백만엔걸 스즈코>를 보는 걸 권유한다. 이화정(<씨네21> 기자)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2008) 이 영화의 수입 배급사가 조금만 센스가 있었더라면, 영화 이름을 삼류 에로물처럼 바꾸지만 않았더라면 더 많은 사람이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를 봤을 거다. 그럼 더 많은 사람이 ‘바르셀로나의 여름’에 대한 환상을 가졌을 텐데. 우디 앨런이 만든 이 영화의 원제는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다. 친한 친구 사이인 크리스티나와 비키가 7, 8월을 바르셀로나에서 보내게 되고 지역의 괴짜 미술가인 후안 안토니오 곤잘로를 만나 각자 사랑에 빠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런 한여름밤의 꿈 같은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으로서 바르셀로나는 최적의 장소다. 영화 내내 화면에 감도는 주황빛의 스페인 햇빛과 개인 요트가 떠 있는 바다, 늦은 밤 연주회가 열리는 풀밭, 숲이 우거진 야외에 지은 예술가의 집, 돌멩이가 깔려 있는 바르셀로나의 골목 구석구석은 여행자의 환상을 부풀리기에 딱이다. 게다가 다른 행성에서 가져온 것 같은 가우디의 건축물은 바르셀로나를 현실과 동떨어진 신비의 장소로 보이게 한다.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과의 만남도 휴가를 떠난 사람이 기대하는 것 중 하나. 아름다운 바르셀로나에서 열정적이고 자유로운 후안 안토니오 곤잘로를 만나고 그의 전부인 마리아를 알게 되면서 비키와 크리스티나의 여름은 더욱 뜨거워지고,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입장에서도 덩달아 뜨거운 여름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면 “이번 여름엔, 꼭 바르셀로나에 가야지”라고 읊조리는 당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를 반복해서 노래하던 여자 목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을 거다. 김윤정(프리랜서 에디터)

녹색 광선(1986) 이 영화를 여름날 떠올리는 이유는, 그 배경이 여름이라서라기보다는 델핀, 그녀 자체가 뜨거운 여름이기 때문이다(에릭 로메르 감독은 60세가 넘은 ‘남자 어른’으로서 젊은 여자의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불안한 심리를 어쩜 이렇게 완전하게 그려낼 수 있는 건지 매번 놀랍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델핀은 매번 특이한 사람으로 비치고 그녀는 그런 시선이, 어쩌면 변하지 않는 자신이 싫어 도망치듯 새로운 곳(사실은 새로운 사람)을 찾아 떠난다. 혼자 산책을 하다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툭’ 하고 눈물을 흘린다. 왜 우는지도 모르고 울고 싶지도 않지만 눈물이 마음을 앞서니 그녀도 어쩔 도리가 없을 거다. 델핀처럼 여름의 시절에는 ‘쟤는 어쩜 저렇게 나 같을까’ 하며 공감을 했고 늦은 여름에 서 있는 지금에는 ‘시간이 지나면 담담해질 텐데’ 하며 열렬한 시절을 떠나보낸 자의 여유를 부려가며 본다. 언제 봐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셸부르, 비아리츠, 생 장 드 뤼즈로 이어지는 채도가 낮은 배경이 그렇고, 조금도 거르지 않고 투과되는 바람 소리가 그렇고, 창이 큰 그녀의 집 안을 장식한 소품과 테이블 위에 놓인 투병한 물병이 그렇다. “여름에는 좀 더운 곳에 가고 싶어, 햇빛이 많은 곳이 좋아”라는 델핀의 말처럼 <녹색 광선>에는 늘 내가 머무는 곳보다 더 많은 햇빛이 내리쬐고 있고 더 뜨거운 공기가 부유한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쥘 베른의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인데, 할아버지가 녹색 광선을 설명할 때는 흐트러진 자세마저 바로잡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 지는 해를 바라보고 서 있는 백발의 할아버지가 그립고 근사한 에릭 로메르인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서고 만다. 조소영(<나일론> 피처 에디터)

EDITOR cho so young

사진 JUNG JAE H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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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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