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유투브 네이버포스트

통합 검색

인기검색어

HOME > Radar

장롱 속의 빈티지

On June 17, 2011 0

이사할 땐 어김없이 안방의 장롱 안에서는 오래된 보물이 쏟아져 나온다. 할머니의 찬장에서 발견한 피에르 가르뎅 유리컵, 어머니의 책장에서 발견한 옛날 요리책 등 집 안 한구석에 숨어 있었지만, 지금은 귀한 빈티지가 되어버린 물건들을 공개한다.


어머니의 요리백과
어머니가 결혼하실 때 누군가에게 선물받은 듯한, 1966년에 발행된 정가 1천5백원의 이 두꺼운 요리백과. 공대를 나온 아버지의 전공 서적들이 아직 책장에 꽂혀 있는 집이라 어릴 때부터 ‘그냥 그런 책들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한문으로 ‘料理百科’라고 적혀 있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한창 집 안에 있는 옛 물건들에 관심을 갖고 있던 때라 보자마자 어머니께 책을 달라고 했다. 별 말 없이 주셨지만 ‘그런 건 가져가서 어디다 쓰려고?’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던 것을 기억한다. 첫 페이지를 펼치면 어머니의 글씨가 나온다. ‘현숙, 정숙, 순결한 아내가 되겠어요’라 쓰여 있는 글을 보고 처음에는 ‘현숙이와 정숙이가 누구지?’라 생각했다. 알고 보니 현숙은 ‘몸가짐이 어질고 정숙하다’는 뜻이고, 정숙은 ‘성품이나 몸가짐이 조용하고 얌전하다’는 뜻. 결혼을 앞둔 어머니의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한 문장이었다. 책은 제목 그대로 요리백과. 한식·일식·양식 등의 다양한 요리의 제조법과 테이블 매너, 영양표 등이 실려 있다. 그중 압권은 권말 부록으로 실려 있는 ‘식품으로 알아보는 운명 판별’. 내용이 충격적인데, 가령 ‘감자를 좋아하는 여자는 60세까지 산다’와 ‘두부를 좋아하는 남자는 타인에게 인기가 많다’는 등의 어이없고 재미있는 도표들이 실려 있다. 이 책을 참고해 요리할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그 귀여운 내용은 지금 이 시대에는 아무 곳에서도 구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중고품 가게를 운영하며 오래된 물건에 좀 더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손님들에게 꼭 보여주고 있는 물건 중 하나다. 김준혁(중고 숍 ‘유즈드 프로젝트’ 대표)

아버지의 오메가 손목시계
요즘 하루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건 스위스에서 만든 오래된 오메가 손목시계다. 이건 아버지의 서랍 속에서 나온 물건 중 하나였다. 어느 날, 이사하려고 짐을 정리하다가 그걸 발견한 아버지는 내게 시계를 내미셨다. “시계 하나 찾았는데, 너 찰래?” 평소에 아버지 팔목에서 볼 수 없던 터라 처음 보는 시계였지만, 알고 보니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할 때 받은 예물 시계라고 했다. 1983년에 결혼을 하셨으니 이건 내 나이보다 많은 ‘진짜 빈티지’인 셈. 평소 워낙 빈티지를 좋아해서 빈지티 제품을 자주 구입하고 또 입고 다니는데, 아버지가 직접 사용하던 빈티지라니 감회가 색달랐다. 게다가 몇 십 년 동안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있던 시계는 내 팔목에 딱 맞았다. 시계를 받은 이후로 거의 매일 그 시계만 사용한다. 우선 디자인이 예쁘니까. 요즘 만들어지는 시계 디자인보다 클래식하고, 프레임이 예뻐서 외출할 때마다 아버지의 시계에 손이 먼저 간다. 물론 빈티지 숍이나 이베이에서 구입한 빈티지 시계도 많지만,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물건이라는 것 때문에 더 애착이 간다.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가 주신 시계 찬 걸 보고 못 본 척하시지만, 그냥 시간을 확인하는 시계가 아니라 아버지 팔목에 채워져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물건이니까 특별한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 아직도 작동하는 게 신기한 이 오래된 시계는 내가 아들을 낳는다면 그 아들에게도 물려줄 거다. 그리고 대대손손 물려줘야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대를 이어 같은 시계를 차고 다니는 남자라, 좀 멋있지 않나? 최진욱(빈티지 애호가)

어머니의 골프화
때는 패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토크쇼 <올리브쇼> 시즌 3에 게스트로 출연하고 있을 당시였는데 녹화 당일, 그날따라 새로운 패션 아이템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그래서 무작정 신발장을 뒤지며 무언가를 애타게 찾던 중, 엄마의 오래된 골프화를 발견했다. 골프화를 본 순간, 절이라도 올려야 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호피가 마구 그려진 패턴에, 소재는 송치인 이 정체불명의 신발. 이것이야말로 트렌드를 일찍이 예상한 이탈리아 장인이 오로지 나를 위해 만든 신발이지 않을까? 사실 이 골프화로 말하자면 10여 년 전, 강남을 배회하던 어머니가 이탈리아 천연 가죽 브랜드 ‘월터 제뉴인’에서 구입한 골프화로, ‘메이드 인 이탈리아’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골프화와 사랑에 빠진 나는 <올리브쇼> 녹화장에 엄마의 신발을 신고 나갔고, 녹화 때 스타일리스트 서은영과 방송인 김나영이 내가 신고 있는 신발을 벗겨볼 정도로 엄마의 골프화를 탐낸 걸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때 이후로 이 골프화를 자주 신으면서 골프화의 기능이기도 한, 골프화 밑창에 박혀 있던 쇠로 만든 징이 이제는 다 닳아버렸다. 그래서 골프화만의 위엄은 없어지고 말았지만, 덕분에 엄마의 골프화란 부담을 떨쳐내고 조금 더 편하게 신을 수 있게 되어 좋다. 요즘도 주목받고 싶은 중요한 자리에 그 골프화를 종종 신고 나가는데, 신발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옷의 스타일링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 자칫 정글 표범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 엄마의 골프화는 어떤 새 신발과도 바꿀 수 없는 ‘물건’이다. 김예림( 편집장)

아버지의 올림푸스 펜 EE-3 카메라
소싯적에 사진 좀 찍으셨던 아버지는 주말마다 어린 나를 데리고 함께 산과 들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곤 하셨다. 영상학과로 진학하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본인이 쓰던 카메라를 다 꺼내놓고 가져가서 쓰라고 말씀하셨다. “이제는 눈이 침침해서 사진도 못 찍겠다”고 말씀하시는 아버지가 짠하기도 했지만, 선뜻 카메라를 내주시는 모습에 놀라기도 했다. 아버지의 카메라는 항상 함부로 만져서 고장 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 내 힘으로 구입하려면 몇 개월이나 아르바이트를 해야 할 물건들을 거저 얻어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므로 눈을 반짝이고 있는데, 그중에서 작고 신기하게 생긴 카메라가 눈에 띄었다. 그게 바로 올림푸스 펜 EE-3. 나중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1970년대 초반에 생산되어 1986년에 단종된 하프프레임 카메라(필름 한 장을 세로로 이등분해서 반쪽만 촬영하는 카메라)였다. 아버지가 사진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 구입했다가 더 좋은 수동 카메라를 구입하면서 장롱 구석에 놓여 있던 걸 다시 찾아낸 거다. 그때 내 손에 들어온 이 카메라는 신입생이던 내 가방 속에 항상 들어 있었다. 가지고 다니기 편하고 24장 필름을 넣어도 48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오래돼서 렌즈에 달린 링이 주저앉는 등 자잘한 고장이 잦지만, 그럴 때마다 남대문에서 고치곤 한다. 중고가로 4만~6만원이니 냉정하게 살펴보자면 카메라값보다 수리비가 더 많이 들었다. 그렇더라도 계속 수리하면서 사용할 거다. 아버지의 카메라니까. 김윤정(<나일론> 피처 에디터)

외할머니의 피에르 가르뎅 컵
평소에는 쇼핑에 관심도 없고 물욕이라곤 도통 없어 뵈는 엄마도 외갓집에만 가면 다른 사람이 된다. 엄마는 처음 보는 물건이나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외할머니에게 “엄마 이건 뭐야?”라고 물어봤는데, 정말 뭔지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는 건 당시 초등학교 1학년생인 나도 알 수 있었다. “이거 나 줘”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일 뿐 엄마의 레퍼토리는 지금껏 조금의 응용이나 변화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 집으로 옮겨온 물건은 포크부터 시작해 가방, 심지어 그림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피에르 가르뎅 컵도 그중 하나였다. 오래전부터 피에르 가르뎅 타령을 하신 외할머니 탓에 나는 ‘피에르 가르뎅’을 할머니들이 좋아하는 괴상한 이름의 브랜드 정도로 인식했고, 그가 유명한 프랑스 디자이너라는 건 대학에 들어갈 무렵에야 알게 되었다. 컵의 하단을 둘러싼 분홍·주황·검정 스트라이프의 독특하고 아날로그한 조합과 간결하고 단순한 디자인은 어떤 음료를 담아놓아도 예뻐서 우유, 오렌지 주스, 맥주, 하다못해 물도 이 컵 안에 담기는 순간 탐스럽고 아름다운 빛깔의 액체로 변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사실 이 컵은 하단의 스트라이프가 다른 색으로 되어 있는 세트가 한 개 더 있는데, 그 컵은 아직도 외할머니의 오래된 찬장 속 선반 위에 놓여 있다. 박물관 안의 소장품처럼 찬장 안에 진열해놓은 채 아무도 안 쓰지만 괜히 양심에 찔려 가져오기가 뭣하다. 외할머니네 들를 때마다 사지도 못할 물건을 군침만 흘리며 윈도 너머로 바라보는 것처럼 슬쩍 보고 오기 일쑤다. 이상희(<나일론> 피처 어시스턴트 에디터)

EDITOR:KIM YOON JUNG
사진 JUNG JAE HWAN

Credit Info

EDITOR
KIM YOON JUNG
사진
JUNG JAE HWAN

2011년 06월호

이달의 목차
EDITOR
KIM YOON JUNG
사진
JUNG JAE HWAN

0 Comment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