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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April 17, 2015 0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장 사이에 꽃잎을 드리웠다.


안토니오 타부키 <꿈의 꿈>
내가 사랑한 예술가들의 꿈을 알고 싶다는 욕망이 자주 날 엄습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내가 들려주는 꿈들로부터 그 예술가들의 정신이 우리에게까지 와닿게 하지는 못했다. 잃어버린 것을 채워달라고 문학에 요청할 때, 어떻게든 해보려는 문학의 시도는 위대하다. 하지만 미지의 꿈들에 대한 향수를 통해 상상하고자 했던 나의 대리 서술은, 그저 빈약한 추정이고 창백한 환영이며 미완의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등장인물들, 그 영혼들은 지금 다른 세상에서 꿈을 꾸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어떻게 읽힐까 하는 것에 대해 상상이 빈곤한 후세에게 너그럽기만 하다. A.T. _서문, 문학동네

“내가 사랑한 예술가들의 꿈을 알고 싶다는 욕망이 자주 날 엄습했다.” 이탈리아 작가 안토니오 타부키의 <꿈의 꿈>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문장이다. 꿈을 정확히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아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꿈의 자유와 억압, 환상과 현실의 반영, 아름답거나 두려운 이미지는 언제나 엿보고 싶고, 기록하고 싶은 욕망의 대상이 된다. 오늘날의 문학에서 고유한 위치를 갖고 있는 작가 타부키는 다른 작가나 예술가들의 꿈을 상상을 통해 엿보고 이를 기록했다. 꿈을 통해 드러난 욕망, 이를 알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글로 쓰고 싶다는 욕망이 위의 문장에 간결하게 응축되어 있다. _한유주(소설가)



다자이 오사무 <여학생>
아빠, 아빠, 저녁노을이 예쁘네요. 그리고 저녁 안개는 핑크빛이네요. 저녁 볕살이 안개 속에 버무려져, 안개가 이토록 부드러운 핑크빛이 됐겠지요? 이 핑크빛 안개가 흐르고 흘러 나무숲 사이를 헤엄치고, 길 위를 거닐고, 초원을 어루만지다가 내 몸을 슬그머니 감싸버렸네요. 핑크빛 볕살은 내 머리칼 한 가닥 한 가닥까지 다소곳이 감싸 안으면서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더군요. 그 무엇보다 고즈넉한 하늘이 아름다워요. 난생처음 머리를 숙이고 싶어요.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을 믿고 싶네요. 이 하늘 빛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장밋빛? 불빛? 무지개? 아니면 천사의 날개? 대가람? 아니, 그것도 아니네요. 좀 더, 좀 더 성스러워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싶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도록 생각했습니다. _51p, 열림원

이 문단은 눈에 담고 소리 내어 읽는 것만으로도 향기로움과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탄력을 느끼게 한다. 동시에 세상이 나의 눈에 미어지도록 아름다운 것처럼 나라는 사람도 이 세상에 아름답게 느껴지면 좋겠다는 애처로움을 어쩐지 느끼게 한다. 이토록 깊은 허기라면 채움을 원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리고 그 생각은 이상하게도 용기를 준다. 나는 스스로 연출하는 자신에게 감상에 빠지며 동시에 혐오하는 마음, 그 삶을 포함한 세상에 대해 가지는 애착과 증오, 이 모든 모순에 대해 함몰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_김사월(싱어송라이터)



안톤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지금 기온은 3도인데, 그래도 눈이 내리는구나.」 구로프가 딸에게 말했다. 「하지만 따뜻한 건 땅의 표면이지, 대기의 상층에서는 기온이 전혀 다르단다.」
「아빠, 그럼 왜 겨울에 천둥이 치지 않아요?」
그것도 설명해 주었다. _271p, 열린책들

“그것도 설명해 주었다.” 이 문장을 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이었다. 그러나 나는 겨울에 천둥이 치지 않는 이유를 단 한 번도 찾아본 적이 없다. 구로프의 딸은 그 원리를 이해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모른다. 어쩌면 지리 시간에, 지구과학 시간에 이미 들었는데 까맣게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일전에 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문학이 좋다. 이유를 설명했다는 문장으로 이유를 설명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다. “그래서 내가 이 구절을 좋아하는 거야?” 그것도 설명해 주었다. _김승일(시인)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익살입니다. 그것은 저의, 인간에 대한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그 주제에, 도저히 남들과의 교제를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저는 이 익살에 의해서만 간신히 남들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항상 웃음을 지으면서도, 내심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줄타기와도 같은 위기일발의, 진땀나는 서비스를 하였습니다.” _17p, 민음사

사람의 솔직하고 편안한 속마음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저런 심정을 간혹 느낀다. 그래서 사람 만나는 것이 피곤할 때가 있고, 내 주위에 서비스를 안 해도 되는 사람이 누가 있나 생각해보게 된다. 또 이 문단을 읽으면 ‘예술가가 예술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자신의 진심을 좀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전달하는 것이 예술의 한 부분이니까. _송시호(뮤지션 ‘밤신사’)



이준규 <흑백>
해가 지다
해가 뜨다
아 저 개 좋다
나보다 비싸겠다
_43p, 문학과지성사

이준규의 시에는 언제나 생활이 있고, 그것은 생활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하다. 그런 무표정 속에서 갑자기 솟구치거나 바닥으로 꺼지는 순간이 그의 시에는 있다. 해가 지고, 해가 뜨고, 개가 지나가고, 그 순간 시인에게 닥쳐드는 진리도 아름다움도 아닌 그 무엇. 그것이 언제나 그의 시를 빛나게 하는 것이다. 비루한 삶의 한순간, 그때 갑자기 꽂혀오는 한 줄기의 광휘, 그런 것이 시가 포착해내는 세계의 표면 가운데 하나이리라. _황인찬(시인)



찰스 부코스키 <우체국>
저녁인지 점심인지 먹은 후(열두 시간씩 근무를 한 후에는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된다) 나는 말했다. 「이봐, 자기. 미안하지만, 이 일 때문에 내가 미쳐 가고 있다는 거 모르겠어? 저기, 그냥 포기하자. 그저 빈둥빈둥 누워서 섹스나 하고 산책이나 하고 얘기는 조금만 하자. 동물원에 가는 거야. 동물을 구경하자. 차를 타고 내려가서 바다를 구경하는 거야. 45분밖에 안 걸려. 오락실에 가서 게임도 하고. 경마장이나 미술관, 권투 경기에 가자. 친구도 사귀고. 웃자고. 이렇게 살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거야. 이러다 죽는다고.」
「안 돼, 행크. 우리는 보여줘야만 해. 아빠랑 할아버지에게 보여줘야만 한다고……」
텍사스 시골 촌년이 할 만한 말이었다.
나는 포기해 버렸다. _93p, 열린책들

처음 저 구절을 읽었을 땐 그냥 웃었다. 찰스 부코스키가 할 만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부코스키라는 남자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두 번째로 읽었을 땐 조금 뭉클했다. 투박하지만 그래서 더 절절한 사랑 고백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결혼을 앞둬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저 구절이 더없이 슬프게 느껴졌다. 아마 내가 ‘텍사스 시골 촌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부터였던 거 같다. _금정연(서평가)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장 사이에 꽃잎을 드리웠다.

Credit Info

EDITOR
PARK UI RYUNG
PHOTOGRAPHER
PARK CHOONG YUL
FLOWER ARTWORK
KOTTBATT
ASSISTANT
RYU MIN YOUNG

2015년 04월호

이달의 목차
EDITOR
PARK UI RYUNG
PHOTOGRAPHER
PARK CHOONG YUL
FLOWER ARTWORK
KOTTBATT
ASSISTANT
RYU MIN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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