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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으로의 도보 여행(2)

On October 15, 2013

고층 건물로 둘러싸인 서울 한복판에 시간의 숨결을 머금은 건축물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1백여 년 전 서양 문물이 막 들어오기 시작한 시기의 근대 건물들은 서양과 한국 전통이 뒤섞여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서울의 기억 속을 걷는 여행을 시작해보자.

근대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 중명전

갈 곳도, 볼 것도 많은 곳이라서인지 서울에서도 가장 복잡한 시청역 주변. 사람들의 바쁜 움직임 속에서 기품 있는 커다란 입구가 눈에 띈다. 직장인들이 많은 곳인지라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외국인 관광객들이 ‘Beautiful!’을 연발하게 하는 이곳은 덕수궁. 유행가 가사 덕분에 그 옆의 돌담길은 로맨틱한 추억의 장소로 꼽히고 있어 유명하다. 하지만 지하철 출구에서 나오면 바로 보이는 덕수궁과는 달리 돌담길을 따라 한참을 더 들어가야 보이는 중명전은 이곳이 덕수궁의 일부라는 사실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 사이에는 미국 대사관저가 자리잡고 있는데, 대부분의 궁이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긴 했지만 이것은 덕수궁이 최근까지도 수난이 거듭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금의 미국 대사관저 자리인 덕수궁과 중명전 사이는 1986년에 미국 대사관 측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의 중명전은 원래 황실 도서관이었는데 덕수궁이 불타면서 고종의 편전이자 외국 사절 접견실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을 돌다 보면 정관헌, 석조전 같은 서양식 건물들이 눈에 띄는데 중명전 또한 현대적인 외관이 특징이다. 이는 러시아인인 사바친이 설계하기도 했지만 근대문물 수용에 관심을 가졌던 고종의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명전은 화려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어 여러 가지로 의미가 깊은 건축물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기도 하고, 이 부당함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들을 파견하기도 한 곳이며, 화재로 원래 모습을 많이 잃고 재건을 거듭해 지금의 모습을 간직하게 되었다. 게다가 왕이 계시던 이곳이 외국인의 사교 클럽으로 쓰이기도 했고,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기증되었다가 다시 민간에 매각되기를 거듭하다 1983년에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정동극장이 매입한 것을 문화재청에서 관리하기 시작한 것도 최근 일이고, 2007년에 덕수궁에 편입되었으며, 2010년에야 복원을 통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으니 그동안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원래의 덕수궁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중명전이 간직한 우리의 역사만은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

1 중명전 외관. 우리의 전통적인 궁과는 또 다른 매력이 느껴진다.
2·4 러시아인인 사바친이 설계해 서양식 요소들이 특징이다.
3 입구에 들어서면 보이는 내부 복도. 이국적인 타일 바닥이 인상적이다.
5 중명전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전시관. 화려한 샹들리에와 벽난로가 눈에 띈다.

Information

관람료 무료(덕수궁은 대인 1천원, 만 7세 이상 5백원)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5시(덕수궁은 오전 9시~오후 9시, 월요일 휴관)
안내 평일 오후 1~4시 1시간 간격, 토·일요일 오전 10~오후 4시 1시간 간격(인터넷 사전 예약 필수)
가는 방법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1·12번 출구,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5번·광화문역 6번 출구 정동극장 옆길(덕수궁은 시청역 1·12번 출구)

영조의 보물 상자를 품다 태령전

표지판도, 담장도 없이 홀로 서 있는 모습이 조금은 서글프다. 경희궁은 그 터가 ‘왕기가 서린 땅’이라는 풍수설이 있어 이를 질시한 일제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다. 2002년에서야 복원이 됐지만 찾는 이가 많지 않아 늘 한적하다. 원래는 1백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고 숭정전, 자정전, 태령전 등 3개의 전각만이 남았다. 경희궁은 유사시에 왕이 본궁을 떠나 임시로 거처하는 이궁으로 지어졌다. 하지만 이궁치고는 규모가 컸고, 왕이 이곳에서 정사를 보면서 서궐이라 불릴 만큼 중요시됐다. <궁궐지>에 따르면 경희궁의 건물 배치는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다른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보통 외전과 내전이 질서있게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과 달리, 경희궁은 두 건물을 좌우에 나란히 놓고 전체적으로 동향을 띄게 만들어진 것이다. 애초에 광해군이 왕기를 누른다는 의도로 이 터에 궁을 지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품격을 낮춰 지은 흔적이 엿보인다. 또, 인왕산 자락의 경사진 언덕 지형을 그대로 사용해 지대가 높고 경치가 뛰어난 것이 경희궁만의 특징이다. 그 중 태령전은 미리 알고 가지 않으면 찾지 못할 정도로 외진 곳에 위치했다. 자정전 왼쪽 구석의 샛길로 들어가거나 궁 밖의 산길을 따라 올라야만 닿을 수 있을 정도다.

태령전은 본래 특별한 용도 없이 지어진 건물이다. 하지만 영조의 초상화가 완성되자 그 초상화를 보관하는 용도로 쓰였고, 사당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10명의 왕이 경희궁을 거쳐 갔지만 특히 영조는 재위 기간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미천한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린 왕이다. 민간에서는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뜬소문이 나돌기도 했는데, 4월에 승은을 입은 숙빈 최씨가 6개월 만인 10월에 첫째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시작된 의심이 둘째 아들인 영조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숙빈 최씨와 궁 밖에서 만난 김춘택이 영조의 진짜 아버지라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이후 평생 괘서와 반란으로 마음고생을 해야 했던 영조는 죽기 직전 “태령전에 있는 내 궤짝을 가져와 관 발치에 놓으라”는 유언을 남긴다. 궤짝에는 영조 자신의 어진과 겨우 종이 몇 장이 전부였다. 하나는 숙종이 영조를 아들로 인정한다는 친필 어찰이었고, 또 하나는 천출 출신인 생모의 한성 출생을 증명하는 호적단자였다. 남들에겐 그저 하찮은 종이일 뿐이었지만 영조에게는 자신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보물이었던 것이다. 영조는 태령전을 혼자만의 비밀 장소로 삼고 숨겨둔 궤짝을 열어보며 콤플렉스를 극복하려 노력했다. 역대 왕 중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하며 조선 중흥을 이끈 성군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도 심적 위안을 준 태령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1 서암에 올라서면 경희궁 전각 지붕이 마천루의 수직선과 함께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2 경희궁 가장 뒤편에 위치한 태령전이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3 오방색이 정교하게 그려진 처마 끝 단청이 궁궐 지붕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다.
4 월대로 오르는 계단 위 답도에는 상상의 새 봉황을 새겨 왕의 태평성대를 기원했다.
5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 ‘서암’. 광해군은 이 바위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말을 듣고 정원군의 집터를 빼앗아 경희궁을 지었다. 흥미로운 것은 실제로 광해군이 정원군의 아들인 인조에게 왕권을 내어줬다는 사실이다.

Information

입장료 다른 4대 궁과 달리 매표소가 없으며, 내부의 모든 전각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6시(동절기에는 오후 5시까지, 1월 1일, 매주 월요일 휴관) 안내 별도의 해설 가이드 없음
가는 방법 광화문역 7번 출구에서 약 700m 도보 이동

고층 건물로 둘러싸인 서울 한복판에 시간의 숨결을 머금은 건축물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1백여 년 전 서양 문물이 막 들어오기 시작한 시기의 근대 건물들은 서양과 한국 전통이 뒤섞여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서울의 기억 속을 걷는 여행을 시작해보자.

Credit Info

진행 / 리빙센스 편집부 사진
임상현, 김지훈, 최재인, 조영수, 박병진
도움말
안효진(쏭내관의 재미있는 史 교육현장 효상궁), 김용관(<영조의 세 가지 거짓말> 저자)
참고 서적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열화당)

2013년 07월호

이달의 목차
진행 / 리빙센스 편집부 사진
임상현, 김지훈, 최재인, 조영수, 박병진
도움말
안효진(쏭내관의 재미있는 史 교육현장 효상궁), 김용관(<영조의 세 가지 거짓말> 저자)
참고 서적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열화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