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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패션계의 파워 우먼 10명

10 Powerful Women

On March 13, 2013

누가 패션계를 움직이는가. 글로벌 패션 인더스트리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우리 시대 열 명의 파워 우먼.

1. 뉴욕 패션계의 대모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 : DVF ceo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는 게 나의 첫 번째 원칙이에요.”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Diane von Furstenberg)는 뉴욕 패션계의 대모다. 1974년에 만든 랩 드레스는 메트로폴리탄이나 스미소니언 같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여전히 DVF 브랜드를 대표하는 아이템이다. 그녀의 인생 자체도 드라마다. 벨기에에서 태어났고, 스위스와 영국의 기숙 학교에서 공부한 뒤 미국에서 패션쇼를 열고, 프랑스에선 출판사를 차렸다. 22세에 독일 왕자와 결혼했으며, 2001년엔 거대 미디어 재벌 배리 딜러와 재혼했다. 하지만 남편들의 부와 명예는 별개라는 듯, 그녀는 늘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자였다. 스물셋에 패션 비즈니스를 시작한 그녀는 20대에 앤디 워홀을 비롯한 ‘팩토리’ 친구들과 어울리며 뉴욕 사교계의 중심이 됐고, 60대인 지금도 셀러브리티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디자이너로 살고 있다. 2009년 백악관 공식 크리스마스 카드에 등장한 미셸 오바마의 드레스도 DVF였다.

“1980년대 초, 회사와 아파트를 팔고 파리로 떠났어요. 다시 뉴욕에 돌아와보니 엉망진창이었죠. 설상가상으로 설암까지 앓았거든요. 그때 생각했어요. ‘아, 내 목소리도, 회사도 다시 찾고 싶다.’ 위기를 이겨낸 건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인 어머니에게 고난과 역경에 맞서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아마도 어머니에게서 시작됐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속적 관심은 DVF라는 이름을 성공한 사업가 이상으로 만드는 대목이다. 다이앤은 에이즈 자선 모금을 위해 마이크를 잡고, ‘더 딜러 -본 퍼스텐버그’라는 재단을 만들어 여성 리더를 위한 DVF상을 수여하며, 교육과 인권·예술 등의 분야에 적극적으로 후원한다. 10분의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녀는 매일 아침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세 통의 메일 전송 일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나는 여성을 응원하기 위해 옷을 디자인해요”

  • 2012년 5월, 뉴욕 DVF 스튜디오.
  • 2012년 4월 트라이베카 필름 페스티벌.

  • 2012년 6월, CFDA 패션 어워드.

2. 정계 진출을 노리는 패션 전략가가 안나 윈투어 : 미국판 <보그> 편집장
<셉템버 이슈>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이 두 편의 영화는 안나 윈투어(Anna Wintour)라는 이름을 보통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녀는 1988년부터 미국 <보그> 편집장으로 군림, 패션계의 트렌드를 바꾸고 도시별 컬렉션의 순서를 바꿨다. 할리우드 배우들을 스타일 아이콘으로 만들며 셀러브리티와 대중 모두를 사로잡은 것도 그녀였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런 표현을 썼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축복 없이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 수도, 빌 게이츠의 축복 없이 실리콘밸리에서 소프트웨어를 출시할 수도 있지만, 안나 윈투어의 축복 없이 패션계에서 성공하는 건 불가능하다.” 흥미로운 건 패션지 편집장인 그녀가 지극히 사업가적인 면모를 보인다는 점이다. 영향력을 총동원해 CFDA의 ‘보그 패션 펀드’나 ‘보그 패션 나잇 아웃’ 행사를 시작했는가 하면, 정치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지난 미국 대선에선 사라 제시카 파커를 비롯한 셀러브리티 패밀리들을 규합해 자선 모금 파티를 벌이며 또 한 번 공개적으로 오바마를 지지했다. 대형 패션 브랜드 간의 합병을 공공연히 중재하고, LVMH의 아르노 회장과도 정기적으로 미팅을 한다고 알려졌다. ‘프렌치 시크’라 불리며 한때 프랑스 <보그>의 상징이었던 카린 로이펠드나 스타일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일본 <보그>의 크리에이티브 컨설턴트 안나 델로 루소는 물론 다른 패션지 편집장들과 가장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짧은 단발머리만 고수하는 행동과 달리 안나는 단순히 스타일이라는 패션의 일차 경계에 머무를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아니, 오바마 정부 주변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영국이나 프랑스 대사설만 봐도 진작에 뛰어넘은 지 오래라고 봐야겠다. 물론 본인의 스타일이야 언제 어디서나 완벽하지만. 대체 누가 그녀를 60대라 믿겠나.

  • 2009년 4월,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갈라 파티.
  • 2013년 1월, 조르지오 아르마니 쇼장.

H&M 스페셜 컬렉션을 결정하는 마가레타.

3. 세기의 컬래버레이션 기획자 마가레타 반 덴 보슈 : H&M 크리에이티브 어드바이저
패션 에디터들에게조차 그녀의 이름은 그리 익숙지 않다. 하지만 프로필을 듣고 나면 H&M의 거대 컬래버레이션 현장마다 결정적 순간에 등장하던 한 여자를 떠올리게 된다. 마치 숨은그림찾기의 한 장면처럼. 칼 라거펠트와 랑방으로 일찌감치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최근엔 베르사체와 마르니,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던 H&M의 컬래버레이션 배후엔 언제나 마가레타 반 덴 보슈(Margareta van den Bosch)가 있었다. 1987년에 수석 디자이너로 들어와 어느덧 20년, 디자인과 바잉에 이르기까지 H&M에서 가장 주요한 결정을 내리는 크리에이티브 어드바이저이자 스웨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 피플로 꼽힌다. “돌이켜보면 놀라울 정도로 전진만 거듭해 왔어요. 불과 몇 명이던 디자인팀이 이제는 150여 명의 인하우스 디자이너들과 함께 우리만의 컬렉션을 만들어내고 있으니까요. 브랜드 고유의 DNA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지금도 세상을 알기 위해 아침마다 신문이나 패션 잡지를 읽으며 하루를 시작하죠.”



2011년 8월, IT관련 컨퍼런스.

4. 숫자로 결과를 보여주는 비즈니스 우먼 안젤라 아렌츠 : 버버리 ceo
버버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안젤라 아렌츠(Angela Ahrendts)가 2006년 CEO로 임명되었을 무렵, 버버리는 정작 2%대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고전 중이었다. 그녀는 굳이 분류하자면 커리어 우먼의 롤모델로 교과서에 등장할 것 같은 타입이다. 가장 중요한 숫자로 결과를 보여주는, 경제지에서 파워 우먼 리스트를 꼽을 때마다 빠지지 않는 인물. 데이먼 맨스웨어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도나카란의 사장과 헨리 벨델 백화점의 부사장을 거쳐, 1998년 리즈 클레이본의 머천다이징 부사장에 이르기까지 가파른 상승 곡선만 그렸다. 리즈 클레이본 재임 기간에 매출을 2배로 올렸으니 버버리가 역전의 용사로 스카우트할 만했다. 그리고 또 한 번 숫자로 존재 가치를 증명해 냈다. 안젤라의 CEO 취임 이래 버버리의 매출은 2배로 늘어 30억 달러에 이르렀고, 영업 이익은 5배 늘어 5억 달러가 됐다. 모두의 버버리를 가장 영국적인 것으로 재정비하면서 트렌치코트를 전면에 부각시킨 전략이 유효했던 것이다. “지난 25년 동안 단 하루도 아파서 결근한 적이 없어요. 내게 직장은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인생의 연장이에요.” 이런 그녀가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새삼 경이로울 뿐이다.



2006년, 영국 아카데미 파티.

5. 백전백승, 천재의 DNA 피비 파일로 : 셀린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패션계는 애초부터 공평함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노력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론 충분하지가 않다. 언제나 모든 걸 다 가진 누군가가 나타나 강호를 평정한다. 셀린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비 파일로(Phoebe Philo)가 그렇다. 타고난 재능으로 일과 사생활을 양립하는 천재형 디자이너. 런던 세인트 마틴 출신으로 스텔라 매카트니의 어시스턴트로 출발해 스물일곱의 나이로 수석 디자이너 자리에 오르며 끌로에의 최전성기를 구가했지만, 피비는 육아와 가족이 더 중요하다며 홀연히 패션계를 떠났다. 3년 후, 셀린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패션계에 복귀해 이번엔 셀린느를 구했다. 사실 그녀에 대한 모든 설명은 아름다운 컬렉션 피스만으로도 충분하다. 진짜 여자를 아는 이가 만들어 여자의 마음을 흔드는 옷과 가방들, 게다가 캣워크에 등장해도 위화감이 없을 만큼 스타일리시한 비주얼 또한 피비가 패션계 안팎에서 워너비 아이콘으로 추앙받는 이유다. 그렇다. 아름다운 건 언제나 옳다. 적어도 패션의 경계 안에선.

2011년 7월, 돌체 앤 가바나 파티.

6. 온라인 패션 비즈니스를 평정하다 나탈리 매스넷 : 네타포르테 창립자, 영국패션의회 의장
‘네타포르테’(Net-a-Porter)는 혁명이었다. ‘하이엔드’ 패션 역시 온라인이라는 대세에 포함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 왜 온라인에선 가격이 비싸다는 이유로 괜찮은 아이템을 살 수 없는지 불만이었던 전직 패션 에디터는 지미추의 CEO였던 타마라 멜론이나 롤랑 뮤레 같은 디자이너 친구들부터 설득했고 결국 대박을 쳤다. 2010년 4월, 리치몬드 그룹은 350밀리언 파운드라는 거금을 주고 네타포르테를 매입했다. 와 <태틀러>에서 패션 에디터로 활동하던 나탈리 매스넷(Natalie Massenet)이 ‘네타포르테’를 시작한 지 약 10년 만의 일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매각은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주주의 한 사람으로, 또 경영의장 겸 창립자로 사업에 관여한다. 2010년부턴 남성복 웹사이트 ‘mr porter’를 시작하며 공격적인 확장을 계속하고 있다. 올 1월부터는 새롭게 영국패션의회 의장직에 올랐다. “패션과 기술은 지속적으로 연관돼야 해요. 어제 핫한 건 오늘이면 끝날 수 있으니까. 기술은 모래 위를 걷는 거나 마찬가지여서 빨리 걸어야 하죠. 가라앉지 않도록. 정말 자극적인 일이에요!” 최근 인터뷰를 보면 어떻게 그녀가 성공할 수 있었는지 납득이 간다.



한결같은 헤어 스타일을 고수하는 레이 가와쿠보.

7. 광기 어린 크리에이터 레이 가와쿠보 : 꼼데가르송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레이 가와쿠보(Rei Kawakubo)는 런웨이의 피날레에서조차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1942년생인 그녀는 1967년엔 일본 최초의 스타일리스트로, 1981년엔 요지 야마모토와 함께 파리 컬렉션에 최초로 초대받은 외국인 디자이너로, 그 이후엔 파인 아티스트와 디자이너의 경계에서 글로벌하게 입지를 확장한 꼼데가르송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며 성공 가도를 달렸다. 말 그대로 패션계의 전설이자 히스토리인데 정작 평범한 사진 한 장 구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레이 가와쿠보라는 이름의 무게는 엄청나다. 과장된 스타일이 주를 이루던 1980년대에 구조주의와 해체주의 패션을 선보였던, 세상의 틀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시도들. ‘아방가르드’라는 말처럼 경계 너머에 있는, 그녀의 말을 빌리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패션. 완벽하지 않은 건 선보이는 일이 없는 작가주의와 올해 에르메스와 스카프 컬래버레이션을 비롯 다양한 아트 컬래버레이션까지, 아무리 시대가 달라질지언정 자신만의 것을 선보이는 레이 가와쿠보의 컬렉션은 말하자면 관습을 탈피한 혁신의 상징인 셈이다. 지난 30여 년간 마크 제이콥스, 드리스 반 노튼 등 수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이 되어왔던 것처럼 그녀의 영향력은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 2012년 런던올림픽 유니폼을 디자인한 스텔라.
  • 2012년 6월, 패션 행사장.

8. 국민 스타의 딸, 국보급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 : 스텔라 매카트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작년 런던 올림픽은 기대만큼 신통한 경제 상승 효과를 불러오지 못했다. 하지만 항상 승자는 있기 마련. 패션계에서 딱 한 사람을 꼽는다면, 바로 유니폼을 디자인하며 국민 디자이너의 위상을 드높인 스텔라 매카트니(Stella McCartney)일 것이다. 영국의 패션 어워드를 싹쓸이하는 가장 잘나가는 디자이너이자 네 아이의 엄마로 ‘맘 시크’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스텔라 매카트니. 물론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 딸이라는 배경이 일찌감치 패션계에서 자리를 잡는 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아빠의 어린 딸을 졸업한 지는 이미 오래전.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끌로에와 스텔라 매카트니, 아디다스 by 스텔라 매카트니라는 세 개의 라인을 가졌던 스텔라는 끌로에를 떠난 이후에도 자신의 레이블을 통해 만드는 옷은 물론 라이프스타일까지 까다로운 런더너들의 추앙을 받는 워너비 아이콘이다. 런웨이에 박제된 것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입고 싶은 스타일리시한 옷을 만드는 여자, 평소 채식을 하고 오가닉을 추구하는 것처럼 절대 모피와 가죽을 사용하지 않는 신념이 담긴 옷을 만드는 여자. 그녀가 바로 ‘진짜’ 스텔라 매카트니다.

  • 2011년, 디올 팝업 스토어 행사.
  • 2010년, 칼 라거펠트와 함께.
  • 2007년 모마 40주년 행사.

9. LVMH 왕국의 상속녀 델핀 아르노 : LVMH 그룹 이사
어쩌면 델핀 아르노(Delphine Arnault)의 가장 위대한 재능은 타고난 배경이 아닐까. ‘열폭’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태어나 보니 LVMH 회장 베르나르 아르노의 장녀라니, 은수저 정도가 아니다. 출발선이 다르다 보니 현재도 다르다. 2010년 추정 2조8천억 유로의 자산을 보유한 그녀는 로레알 회장과 함께 프랑스 최고의 여성 갑부로 꼽힌다. 물론 전 세계에서도 손에 꼽힐 테지만. 평소 미술품을 수집하고 아버지와 성격이 비슷한 것으로 알려진 델핀은 2002년 이미 LVMH의 주식 7.5%를 보유한 대주주로, 2003년엔 LVMH 최연소 이사로 임명되며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점쳐지고 있다. 패션계에서의 영향력이야 두말하면 피곤하다. 영부인들이 추진하는 소위 ‘펫 프로젝트’가 그러하듯, 그녀가 집중 관리하는 디올이 결국 탄탄대로를 밟으리라 모두 예상하는 이유기도 하다. 2005년, 이탈리아 와인 명가 출신의 알렉산드로 간치아와 올린 결혼식 또한 그 방증이다. 약 700만 달러가 든 역사상 가장 비싼 결혼식이기도 했지만 존 갈리아노가 웨딩드레스를 만들고, 칼 라거펠트가 웨딩 사진을 찍고, 엘리자베스 헐리와 마크 제이콥스 등 그녀의 셀러브리티 친구들이 총출동했다. 당시 대통령이던 사르코지 또한 하객이었다. 워낙 사생활이 베일에 가려 있음에도 최근 이혼 및 출산설이 도는 델핀 아르노. 또 한 번 결혼식이라도 올린다면 이번엔 과연 누가 나설지 벌써부터 궁금증이 인다.

  • 1995년, VH1 패션 어워드.
  • 1995년, 프라다 패션쇼장.
  • 2012 S/S 프라다 피날레.

10. 아트 프로젝트의 명장 미우치아 프라다 : 프라다 & 미우미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낙하산이나 비옷처럼 군수품 제작에 사용되던 가볍고 질긴 나일론 백. 20세기의 잇 백으로 꼽히는 프라다 블랙 백팩은 아이러니하게도 디자인이 아니라 정치학을 전공한 어린 수석 디자이너의 손에서 탄생했다. 이브생로랑을 입고 공산당 집회에 참석하던 전형적인 중산층 소녀에서, 결국 외할아버지부터 이어져온 고급 가죽 제품을 만드는 패밀리 비즈니스에 뛰어든 미우치아 프라다(Miuccia Prada)가 그 주인공이다. 정갈하면서도 우아한 디자인과 여성스러운 이미지로 오늘날엔 럭셔리 브랜드의 상징이 됐지만 컬렉션 초기에는 굴곡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사업적 동반자인 파트리치오와 결혼해 그가 사업 부문을 전담하면서 환상의 커플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이 커플은 예술과 건축에 조예가 깊어, 프라다 재단을 설립해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있다. 텍사스 한복판에 모조 상점을 짓고 본사와 전 세계 매장 건물을 종종 예술 작품으로 둔갑시킨다. 렘 쿨하스가 건축한 뉴욕 소호의 에피센터나 자크 헤어초크와 피에르 드 뫼른이 건축한 도쿄 에피센터가 대표적이다. 2009년 경희궁에 설치했던 렘 쿨하스의 거대 구조물 ‘트랜스포머’ 역시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나 지금이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지키는 프라다의 고집이야말로 2013년에도 프라다를 현재진행형으로 만드는 원동력이다.

누가 패션계를 움직이는가. 글로벌 패션 인더스트리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우리 시대 열 명의 파워 우먼.

Credit Info

2013년 03월 01호

2013년 03월 01호(총권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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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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