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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2호 EDITOR'S LETTER

On May 06, 2015

크리스토퍼 베일리가 잠깐 서울에 왔다.

EDITOR IN CHIEF 안성현

크리스토퍼 베일리가 잠깐 서울에 왔다.
맞다. 디자이너를 지나 이제는 버버리의 CEO로 등극한 그 말이다. 비오는 오후 2시 15분. 홍콩으로 출발하기 직전 편집장들의 점심 식사 자리에 나타난 그의 목소리가 환했다. 수년 전 남산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그의 목소리가 휘핑크림 같았다면, 오늘 그의 울림은 샴페인 잔의 부딪힘처럼 찰랑였다. 묵직한 나무 벽 안에 갇힌 레스토랑의 공기들이 일순 술렁이는 것 같은…. 뭔가 달라졌다고 느낀 건 나뿐일까. 지나치게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그러면서 지루하지도 경박하지도 않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고 생각하며 인사를 나눴다. 감성으로 점철된 최고 결정권자가 가진 묘한 균형감.
얼마 전 브랜드 관계자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소위 말하는 예술 하는 사람들이 CEO가 되는 건 환영이에요. 하지만 본인 스스로는 너무 괴롭지 않을까요?” 예술 하는 이는 무작정 섬세하고, 한없이 여리고, 끝 간 데 없이 예민할 거라고, 아니 뭐랄까 꼭 그래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상뇌와 하뇌, 좌뇌와 우뇌의 완벽한 균형은 지나치게 모범생스럽지 않은가. 재정 관리와 감성 관리를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다는 건 너무 비현실적인 거 아닌가. 혹 매출 관리 때문에 예술가의 DNA를 하나씩 들어내야 한다면 스스로의 삶에 만족할 수 있을까. 그 생각이 무너진 건, 베일리 같은 이들을 자꾸 만나게 되면서다. 토막토막 시간을 잘게 쪼개 자신의 옷이 팔리는 나라를 돌아보고, 매장과 매출을 감수하는 예술가라니! 나는 순간 디자이너 갈리아노의 말을 떠올렸다. ‘나의 직업은 사람을 유혹하는 일이다.’ 이 단순한 문장이 가슴을 친 건 명쾌해서다. 흔히 디자이너를 예술가라 하고, 예술가의 인생을 외길이라 하고, 그 외길 인생엔 종잡을 수 없는 형이상학이 함께한다고 믿지 않는가. 하지만 보라. 고수는 자신의 직업을 두부모 자르듯 단박에 정리한다.
‘사람을 유혹하는 일.’ 유혹하지 못하면 실패하는 게임. 이 ‘유혹’이란 단어에 정답이 있다. 하나, 둘, 백, 천, 만… 유혹의 덫에 걸린 이들이 많을수록 승기를 거머쥐게 되는 치명적 게임. 그러니 옷을 만든 자는 그 옷을 많은 이에게 입히는 게 옳다. 더, 더, 더 많은 이들에게. 대중의 외면은 독약이다. 어쩐지 감수성이 예민한 크리에이터의 마케팅과 판매 전략이 더 강하면 강했지 약하진 않을 거란 확신이 든다. 창작자의 불타오르는 전의를 누가 감히 따라잡을 수 있을까. 섬세한 영혼의 소유자들이 대중을 유혹하기 위해 취할 진보적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우리 <그라치아>를 더, 더, 더 많이 팔고 싶다!

PS 나는 <그라치아> 기자들의 기민한 촉수가 참 좋다. 무심히 넘어가기 쉬운 화두를 붙잡고 늘어지는 그들의 질긴 신경줄이 좋다. ‘왜 한국엔 여자 스타 셰프가 없을까?’ 하고 묻는 자세. ‘마른 몸매 조장, 모두 패션계만의 문제로 돌려도 되나?’, ‘피키캐스트 에디터들은 핵꿀잼을 도대체 뭐라고 생각할까?’ 뭐… 이런 거. 가볍게 접근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한번쯤 골똘히 생각해 볼 만한 문제들. <그라치아>의 유혹에 빠져들 준비, 다들 되셨는지?

EDITOR IN CHIEF : 안성현

발행 : 2015년 54호

크리스토퍼 베일리가 잠깐 서울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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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5월 02호

2015년 05월 02호(총권 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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