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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너랑 이상한 썸

On April 29, 2015

썸 타는 것도 아니고 안 타는 것도 아닌, 이상한 관계.

  • 여자 모델이 입은 의상, 신발 모두 나이키.

하나! 둘! 셋! 넷!
우렁찬 구령 소리가 들린다. 나는 트레드밀 위에 있다. 시선은 전방을 향해 있지만 내가 보고 있는 건 TV 속의 <오늘 뭐 먹지?>가 아니라 유리창이다. 정확히는 유리창에 비치는, 내 뒤에서 벌어지는 광경이다. “자, 조금만 더! 다 왔어요!” 트레이너는 여느 때처럼 큰 소리로 아주머니 회원에게 복근 운동을 시키고 있다. 자리도 많은데 왜 굳이 내 뒤에 와서 하는 걸까? 왠지 팔자로 걷고 있는 것 같아 슬며시 걸음걸이를 바로잡는다.

처음 이곳을 택한 가장 큰 이유는 여성 전용 헬스클럽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심을 품고 헬스클럽에 다닌 적은 없지만, 몸 좋은 남자들이 집중해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간다. 그러다 보면 남자들의 시선도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차라리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 없는 여성 전용 헬스클럽이 편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귀찮은 일이 발생할 수 있는 여지를 사전에 차단하겠달까?

처음 상담할 때만 해도 빨리 등록을 마치고 약속 장소로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상담을 해준 트레이너 ‘람보’는 콧수염을 길렀는데, 그냥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흔히 마주치는 멋 부리기 좋아하는 남자애들을 보는 느낌이었다. 옆에서 다른 사람을 운동시키던 트레이너 ‘제임스’는 머리 스타일만 눈에 띄어 ‘웬 2 : 8?’이란 감상이 전부였고. 살짝 귀찮게 느껴지는 PT 권유를 정중히 거절하고 등록을 마쳤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상황은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곳은 매일 지하철역 앞에서 ‘3개월에 10만원!’이라는 전단지를 뿌려댔다. 여고생부터 할머니까지 이 동네에 사는 여자들 절반은 다 여길 다니기로 작정했는지, 짧은 시간 안에 회원이 엄청나게 늘었다. 여섯 명 남짓한 젊은 남자 트레이너들은 울룩불룩한 팔 사이에 차트를 끼고 1층부터 4층까지를 누비며, 혼자 운동기구 앞에서 헤매고 있는 여자들에게 사용법을 가르쳐주고, 틈틈이 막 들어오는 회원들에게 거울로 눈인사를 보냈다.

이상한 기분은 새로 등록한 회원의 의무 사항인 OT를 할 때부터 시작됐다. 헬스클럽에 있는 모든 운동기구의 사용법과 혼자 할 수 있는 간단한 운동법을 배우는 시간인데, 나는 처음부터 람보 쌤에게 상담한 후 등록했기 때문에 OT도 그에게 받았다. “팔을 좀 더 올리세요.” 그가 내 뒤에 바짝 붙으며 말했다. 기분 나쁠 정도는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거침없는 스킨십에 좀 놀랐다. 누워서 하는 동작을 할 때는 기분이 더 묘했다. 나는 누워 있고 트레이너는 서서 나를 내려다봤다. 느낌이 편안하지 않았다. 그다음부터 내가 헬스클럽에 들어서면 람보는 PT를 하다 말고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내가 운동을 하면 움직이는 곳마다 시선으로 쫓으며 거울을 통해 계속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에게 PT를 받고 있는 여자는 예쁘장하고 젊었다. 나이키 신상 트레이닝복을 입고 머리도 가지런히 묶었다. 람보의 목소리가 왠지 더 친절하고 상냥하게 들렸다. 나는 일부러 그쪽은 절대 보지 않고 운동했다. 아주머니들은 곧잘 문 앞에 삼삼오오 모여 트레이너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어제 혼자 왔는데 제임스가 자기한테 어쩌고저쩌고 말을 걸더라, 바깥에 붙어 있는 사진은 실물이랑 다르더라 등등.

일주일에 세 번 있는 GX 수업도 람보가 가르쳤다. 모두가 아름다운 몸매를 위해 가장 보기 흉한 자세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을 때, 단상 위에 있던 람보가 갑자기 내 쪽으로 내려왔다. 나만 쏙 빼고 내 앞과 옆의 아주머니들에게 “팔을 좀 더 올리세요!”라고 말하며 스쳐 지나갔다. 그런 날엔 왠지 운동도 더 잘됐다. 집에 오는 발걸음도 말할 수 없이 상쾌했다.

두 번째 OT 시간이 끝날 무렵, 람보가 또 한 번 PT를 권유했다. “지금 딱 잡아놔야 해요. 제가 책임지고 엉덩이를 허리까지 붙여드릴게요.” 람보의 엉덩이는 진짜로 허리에 붙어 있었다. 혹했지만 지금 PT를 하면 나는 파산할 게 분명하다. 일단 생각해 보겠다고만 했다. 다음 날 또 내 바로 뒤에서 PT를 끝낸 람보가 내 옆의 아주머니에게 다가와 운동은 잘되느냐고 물었다. 나는 모르는 척 속도를 더 높였다. 그가 곧 내 옆으로 오더니, “PT 생각해 보셨어요?”라고 물었다. 당황했지만 어쨌든 안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그가 “안 됩니다. 회원님은 꼭 PT 하셔야 돼요”라며 단호박처럼 말하더니 사라졌다. 뭐지? 모든 회원한테 이렇게 말하나? 그런데 이 정도면 강매 아냐? 머릿속 생각과는 상관없이 나만 알 정도로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그렇다고 내가 람보를 좋아하느냐 하면, 그건 또 절대 아니다. 헬스클럽에 오지 않는 시간 동안 그 사람을 생각한 적이 없다. 여자 친구가 있을까 짐작해 본 적도 없고, 집은 어디일까란 식의 상상도 절대 해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이 이상한 ‘썸’은 철저히 헬스클럽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 달여가 지나자 나는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헬스클럽 문가에만 오면 두 배로 바운스하는 심장을 느꼈다. 클럽 안에선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트레이너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느라 눈이 재빠르게 돌아갔다. 트레이너가 아닐 때의 실망감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렇게 두 달 정도 시간이 흘렀다. 람보는 변했다. 일단 내게 큰 소리로 인사를 하지 않았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까딱하는 정도였다. GX 수업을 할 때도 좁은 단상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섬인 것처럼 절대 내려오지 않았다. 스쿼트 자세 10초를 유지하다가 중간에 주저앉은 내게 람보는 이렇게 외쳤다. “어어, 거기 뒤의 분!” 요즘엔 운동을 하러 가는 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느껴진다. 황금 같은 저녁 시간을 여자들이 바글바글한 헬스클럽에서 보내야 하다니! 자연히 운동을 빠지는 날도 늘어갔다.

운동 말고 다른 게 신경 쓰이는 걸 ‘귀찮은 일’이라 단언했지만, 오히려 헬스클럽이야말로 작은 ‘썸’이 필요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트레이너와의 꾸준하고 적당한 수준에서의 ‘밀당’이 운동에 긍정적인 효과를 주는 게 나만은 아닌 모양이다. 람보와 수업을 할 때는 “에구에구! 쉬운 걸로 해줘요~” 하던 아주머니들도 여자 트레이너가 강사인 GX 프로그램에서는 찍소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여자 강사가 운동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오산이다. 일단 회원들의 수업 참여율 자체가 엄청 저조하니까.

운동에서 다시 등을 돌릴 즈음, 뜬금없이 제임스에게 문자가 왔다. ‘000Gym’으로 시작되는 단체 문자였다. 봄이 됐으니 열심히 운동하자는 내용. 그런데 수신 번호가 개인 휴대폰 번호다. 원래 이런 단체 문자는 공식 번호로 오지 않나? 이거, 나한테만 온 문자 아닐까? 사실이 어떻든 상관없다. 다시 운동을 시작할 때가 왔다.

EDITOR : 김소영
PHOTO : 김영훈
MODEL : 박희정
HAIR & MAKEUP : 아영(보떼 101)
LOCATION : 마이핏 휘트니스 신사점

발행 : 2015년 53호

썸 타는 것도 아니고 안 타는 것도 아닌, 이상한 관계.

Credit Info

2015년 05월 01호

2015년 05월 01호(총권 53호)

이달의 목차
EDITOR
김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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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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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보떼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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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5월 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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