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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March 03, 2015

소설가로서 문화예술위원회가 지원하는 작가 해외 레지던스 프로그램의 수혜자로 선정됐다. 덕분에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1월까지 3개월간 베를린에서 실로 우울한 시간을 보내다 돌아왔다.

  • 베를린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슈프레 강과 유람선.

어떤 도시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신체에서 생기가 빠져버리고, 삶의 의욕 같은 게 일상에서 증발돼 버리고 만다.
‘부다페스트’를 떠올리면 첩보원이 생각나고, 겨울의 ‘스톡홀름’을 떠올리면 해가 뜨지 않는 도시란 생각이 든다. ‘런던’은 맛없는 음식과 우울한 날씨가 떠오른다. 이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결합한 공간이 베를린이다.
우울하고, 어둡고, 음침하고, 음식은 짜다. 할 일이라곤 오로지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는 것뿐이다. 늦잠이라도 자서 어영부영 12시쯤에 소시지로 브런치를 먹을라치면 ‘아, 소시지 하면 맥주지!’란 생각에 오전부터 맥주를 마시게 된다. 그러면 집 밖은 어느새 캄캄해진다. 웬 과장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실화다. 내가 직접 겪었다. 때는 오후 3시 반이었는데, 밖은 새벽 2시처럼 어두웠다. 물론 사람들의 얼굴도 어둡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어쩌긴 그냥 살아야지. 그래서 다들 맥주를 마시는 것이다. 벌컥벌컥!

  • 슈프레 강을 마주한 하케셔 마르크트(시장)에 위치한 노천 카페.

자, 기왕 이렇게 된 거 인생에서 몇 달쯤은 햇볕을 쬐지 않고 살아도 무방하다. 이런 식으로 평생을 산다면 모차르트처럼 비타민 D 결핍으로 사망할지 모르겠지만(독일인은 이를 예방하기 위해 비타민 D가 나오는 전등을 쓴다. 믿기 어렵겠지만 말이다), 몇 달쯤이야 오히려 천연 미백 효과가 발휘되니 우울의 바다에서 그저 술잔만 기울이며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원양어선을 탔다거나, 장기간 파병을 왔다거나, 인생에서 겪을 시련을 미리 경험한다는 낙천적인 자세로 맞이하면 그만이다. 이 정도로도 동기 부여가 되지 않는다면,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선박 연료가 떨어져 조난을 당했는데 그 종착지가 무인도라 생각하면 된다. 나는 베를린을 유배지라 생각하고 매일 일기를 썼다. 헤밍웨이도 썼고, 서머싯 몸도 썼다는 다이어리에 매일 자필로 일기를 쓰니 ‘아, 이래서 유배 문학이 탄생하는구나!’ 하고 다산(茶山)을 이해하게 됐다.

  • 베를린에서 유일하게 영어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소니센터 내 서점 진열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베를린에서 지내는 3개월 동안 할 일이 많아졌다. 일단 당연한 일과로 매일 맥주를 마셨다.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레스토랑에서는 물이 맥주보다 비쌌으니 물 대신 마시기도 했다. 서울에서 익히 알고 접했던 ‘파울라너’나 ‘호프 브로이’ 같은 것도 마셨지만, 내가 가장 매료됐던 맥주는 ‘벨틴스’(Veltins)였다. 와인 잔에 담아주는 벨틴스는 기찻길만큼이나 뚜렷한 ‘엔젤링’을 남기며 남성적인 쓴맛과 여성적인 목 넘김, 그리고 톡 쏘는 사춘기 청소년 같은 탄산을 선사했다. 한때 맥주에 미쳐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 10여 년간 틈틈이 맥주 여행을 떠났던 내게 ‘벨틴스’는 그 기나긴 여정의 종착역이 되었다.

  • 베를린의 중심 지구인 미테에 위치한 한 양조장 겸 맥줏집 뒤로 노을이 지고 있다.
  • 유태인을 학살한 과거를 반성하기 위해 조성한 메모리얼 파크의 전경.

안주로 가장 좋은 것은 독일식 족발인 ‘슈바인학센’과 독일식 돈가스인 ‘슈니첼’이다. 슈바인학센은 구운 것이 있고 찐 것이 있는데, 구운 것은 껍질이 맛있고 찐 것은 야들야들한 속살이 맛있다. 해는 뜨지 않고 언어는 딱딱하고 음식은 맛이 없고 상점은 일찍 문을 닫지만, 이 우울함과 어둠 속에서도 맥주와 학센, 슈니첼이 있어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기본적으로 삶은 우울한 것이라고 동의하는 회의주의자들에겐 좋다). 혹시나 아직도 낭만과 생기와 활력을 원한다면 당신의 사전에서 ‘겨울의 백림’(베를린)을 지우기 바란다. 단, 여름에 간다면 앞서 언급한 모든 것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 그래서 나도 여름에 다시 한 번 가볼 생각이다. 심지어 호숫가에서도 상체를 벗고 선탠을 즐긴다. 독일은 FKK라 불리는 나체주의자들의 나라 아닌가. 그들은 공공장소에서도 옷을 훌러덩 벗는 아름다운 선진 문화를 이룩해 놓았다. 독일이라 해서 물론, 모든 게 우울한 건 아니다. 말했다시피, 독일은 나체에 상당히 관대한 나라다. 베를린은 수도니 말할 것도 없다. 습식 사우나에 가면 남녀가 나체인 상태로 눈웃음을 주고받고 각자 뜨거운 벤치에 앉아 땀을 뺀다. 수건을 국부에 두르는 건 자유지만 내 경험상 입장할 때나 두르지, 앉아서까지 수건을 두르고 있는 치는 없었다. 물론 나도 그랬다. 그리고 들어올 때만 눈웃음으로 안부를 건넬 뿐, 나체가 되면 목에 깁스를 한 듯 서로 벽만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남녀가 한곳에 나체로 태연히 있는 것은 이색적인 경험이다.

베를린에 가면 이것만은 꼭!

슈바인학센

영국엔 피시 앤 칩스가 있고, 이탈리아엔 피자와 스파게티가 있다면, 독일에는 슈바인학센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맥주를 곁들이지 않으면 맛이 없다. 독일의 모든 음식은 맥주와 함께해야 그 맛이 완성된다. 심지어 밤공기도 맥주를 마시고 들이마셔야 맛이 난다. 태초에 말씀이 존재하고 그 후에 인간이 창조되었듯, 독일에는 태초에 맥주가 존재했고 그 뒤에 음식이 창조된 듯하다.

브란덴부르크
과거 베를린을 동독과 서독으로 분리시켰던 상징적인 공간이다. 때마침 장벽 붕괴 25주년 행사가 열려서, 베를린의 모든 시민이 브란덴부르크 광장에 모였다. 안개가 자욱한 곳에서 폭죽을 터트리며 자유를 함께 누릴 수 있음을 기념했다. 간혹 극우 세력이 보이긴 하지만, 유럽에서 베를린만큼 시민 의식이 훌륭하고 정치적으로 성숙한 곳도 찾아보기 어렵다.

올림피아스타디온
독일은 축구의 나라 아닌가. 하지만 수도 베를린은 가난하다. 그리하여 패권은 상업 도시인 뮌헨에 양보했고, 성숙한 시민 의식으로 매번 참패하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본다. 물론 맥주를 마시며. 분데스리가 경기를 보러 갔을 땐 속이 탔는지 초등학생마저 아버지의 입회하에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독일은 만 16세부터 음주가 합법이다. 역시 맥주의 나라다).

WORDS : 최민석
EDITOR : 김나랑
PHOTO : 최민석

발행 : 2015년 49호

소설가로서 문화예술위원회가 지원하는 작가 해외 레지던스 프로그램의 수혜자로 선정됐다. 덕분에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1월까지 3개월간 베를린에서 실로 우울한 시간을 보내다 돌아왔다.

Credit Info

2015년 03월 01호

2015년 03월 01호(총권 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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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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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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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