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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 있는 뜨개질

On January 28, 2015

두 손에서 휴대폰을 치우고, 대바늘 두 개를 잡는 여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에겐 그 고요한 시간이 필요하다.

한겨울 공원에서 뜨개질을 즐기는 아만다 사이프리드.

미우미우의 복덕방 방석 같은 니트 조끼를 입은 미로슬라바 듀마부터, 뜨개질 장인으로 거듭 중인 소유진이 만든 루피망고 모자 세트, 손뜨개질 목도리로 변장한 엄정화 등등 SNS 속 뜨개질 열풍.

이제 동네 뜨개질 숍을 지날 때 좀 더 유심히 살펴보자.
그곳에 걸린 촌스러운 뜨개옷이 첨단 패션계가 주목하는 것들이니까. 의심하지 말라. 꼭 복덕방 방석처럼 생긴 뜨개 니트가 이번 시즌 미우미우 리조트 컬렉션의 키 아이템이었다. 뒤이어 선보인 2015 봄/여름 컬렉션에서도 손뜨개 열풍은 이어졌다.

지방시의 크로셰 원피스부터 셀린느의 프린지가 술렁이는 롱 니트 드레스, 로에베의 엉성한 홀터 니트 톱까지. 사고 싶다는 생각보다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손뜨개 옷들이 잘나가는 하이패션 브랜드마다 나온 건 촐싹대는 유행 때문만은 아니다.

요즘 패션은 라이프스타일과 샴쌍둥이처럼 함께 움직인다. 오래된 경제 불황, 반사회적인 젊은이들의 등장 등 2015년은 과거 1970년대와 꼭 닮았다. 히피들이 활개를 치던 그 시절, 색색의 뜨개옷이 유행하던 그때.


‘히피는 무엇보다도 자유와 사랑을 찾고, 자신을 위해서 살려고 한다. 체질적으로는 외면적·기성적인 것에 만족할 수 없으며, 무엇이든 자기 손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가 많다.’ 히피에 대한 정의가 지금의 우리에게도 통한다.

해외발 뜨개질 트렌드만 있는 게 아니다. 지난겨울 거리는 사람 반, ‘루피 망고’ 모자 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0만원 가까이 하는 고가의 털실은 50대 아줌마가 아니라 20~30대 여자들이 주 고객이었다. “요즘 뜨개질을 새로운 타입의 요가라고 해요. 반복적인 동작이 주는 안정감, 작품을 만드는 성취감 등 뜨개질은 확실히 현대인들에게 적합한 취미죠.” 플레이울의 김나영 대표 말이다. 머리에 과부하가 걸린 이들에게 뜨개질은 정신적인 요가다. 아인슈타인도 머리를 비울 때는 뜨개질을 했다고 하지 않는가.

“니트 모자가 쓰고 싶었는데 어울리는 모자가 없어서 직접 만들어볼 요량으로 실과 바늘을 구입했어요. 그러고는 유튜브로 뜨개질을 배우기 시작했죠.” 패션 쇼핑몰 ‘어스몰에이’ 운영자인 추혜원은 뜨개질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뜨개빵’이라는 워크숍도 열었다. 뜨개빵은 차도 마시고 빵도 먹으면서 뜨개질하자라는 취지로 직물 상점인 유익점과 함께 기획한 워크숍이었다. 학생, 뮤지션, 공무원 발령 대기자 등 각양각색의 20~30대 남녀가 모여 커피숍에서 뜨개질을 한다? 왠지 어색할 것 같은 그 풍경이 요즘 주변에서 종종 목격된다. 이태원, 연남동 일대에는 이런 소규모 뜨개질 모임이 수십 개가 넘는다. 갤러리아백화점의 플레이울 매장에서도 목·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후 3~6시까지 뜨개질 클래스가 열린다. 문 닫기 일보 직전이던 뜨개질 숍에도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때아닌 뜨개질 열풍이 하이패션부터 대중에게까지 널리 퍼져나가고 있는 것.

노르웨이에는 이상한 방송국이 있다. 일명 슬로 TV로 불리는 공영 방송 NRK에서는 번쩍거리는 자막도, 깔깔거리는 리액션 소리도 없이 줄곧 묘한 장면만 틀어준다. 예를 들면 그들은 베르겐에서 오슬로까지 가는 기차에 카메라를 달고 7시간 내내 기차가 달리는 풍경을 보여줬고, 어느 날은 12시간 내내 장작이 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 최근에는 멍하게 뜨개질하는 모습을 8시간이나 방영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의 인기가 의외로 높다. 20% 시청률은 기본이고 후티루튼 크루즈가 노르웨이 피오르 해안을 항해하는 134시간, 약 6일간을 쉬지 않고 방송한 프로그램은 노르웨이 국민의 50%가 시청한 최대의 히트작이다.

인기 비결은 간단하다. 사람들에겐 ‘무념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꽉 찬 머리를 탈탈 털어내고, MSG 같은 자극 없이 순수하게 순간을 음미하는 시간. 그 시간을 보내려는 사람들이 슬로 TV에 빠지고, 컬러링 북을 베스트셀러로 올려놓고, 또 한 타래에 10만원 가까이 하는 털실을 품절 사태로 만들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속도 조절에 나섰다. 폭주 기관차처럼 질주하던 시대에 제동을 건 주인공은 뜨개질이나 컬러링 북같이 소박한 것들이었다.

바늘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새살이 돋듯, 니트 조각이 몸을 불려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꽤 흐뭇하다. SNS를 타고 들어오는 무자비한 정보의 압박에서 살짝 비켜 선 기분도 나쁘지 않다. 또 히피들처럼 내 것을 내 손으로 만드는 성취감은 졸업식장에 선 학생에 비할 바가 아니다. 고요한 밤 휴대폰을 버리고 대바늘을 잡아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EDITOR : 김민정
PHOTO : Splashnews/Topic

발행 : 2015년 47호

두 손에서 휴대폰을 치우고, 대바늘 두 개를 잡는 여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에겐 그 고요한 시간이 필요하다.

Credit Info

2015년 02월 01호

2015년 02월 01호(총권 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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