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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의 파워 우먼이 말하는 터닝 포인트와 커리어의 기술.

Power Women

On October 18, 2013

대기업의 임원이자 리더인 동시에 누군가의 엄마.조직과 가정을, 일하는 여자들의 문화를 변화시킨 4인의 멘토들.그들을 바꾼 결정적 순간과 커리어 기술들.

신 은 주
하이트진로 상무, 마케팅 실장

1971년생
2005년 성균관대 언론대학원 석사
1994년 오리콤
1999년 동방커뮤니케이션즈
2002년 TBWA KOREA
2010년 하이트진로

성공이 아니라 재미를 따라 움직이되 언제나 전력투구했다. ‘생각대로T’ ‘사람을 향합니다’ 등을 만들어낸 광고계의 히트메이커에서 하이트진로의 마케팅 브레인으로 변신한 신은주 상무. 그의 커리어는 전형성을 비껴간다.

하이트볼 챔피언십 개막전 당시의 시구 모습.

일탈
“고등학교 때 몇 달간 학교에 안 간 적이 있어요. 제 안에서 ‘꼭 학교에 가야 하나?’라는 의문이 생겨서요. 고향 사람들은 다 제가 ‘중졸’이 될 줄 알았대요.”

하이트진로의 신은주 상무는 전형적인 모범생 타입과는 거리가 멀다. 결국엔 학교로 돌아가 대학까지 졸업했지만 목표 의식이 뚜렷하지도 않고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도 없었다. 오히려 즉흥적인 성격에 가깝다.

“보통 뭐가 돼야겠다는 마음이 있잖아요. 좀 시니컬했던 제게는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게 재미였어요. 그렇게 첫발을 디딘 게 광고회사 오리콤이었고요. 여태껏 직장을 옮기거나 뭔가를 시도할 때 늘 같은 기준으로 움직였어요. 내가 이 일을 하는 게 더 이상 즐겁지가 않다? 노력도 할 만큼 해봤는데 그 상태가 한두 달 이상 지속된다? 그 시점이 바로 제가 다음을 찾아 움직이는 순간이었어요.”





이직
지난 2010년, 그는 커리어에 있어 가장 큰 전환점을 맞았다.
오리콤을 시작으로 TBWA까지, 10여 년간 몸담았던 광고계를 떠나 하이트진로의 마케팅 실장이자 상무로 변신한 것이다.
주류 회사답게 보수적인 기업 문화를 가지고 있던 하이트진로가 최초로 외부에서 영입한 여성 임원이었다.

“그 무렵, 새삼 ‘나는 뭘 원하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나는 정말 광고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인가. 마침 30대에서 40대로 딱 넘어가는 시점이었거든요. 처음으로 제대로 인생을 설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요하게 자문해 봤어요. 그랬더니 저는 광고를 만들고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하는 표면적인 행위보다 광고라는 도구를 가지고 문화를 움직이고 시장을 바꾸기도 하는, 그런 영향력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더라고요. 광고를 떠나 좀 더 넓은 분야에서 영향력을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이트진로라는 보수적이고 남성적인 회사에 도전해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고요.”



변화
“이직하자마자 유니폼을 입는 문화부터 바꿨어요.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놀랐던 게 ‘다음 주 월요일부터 자유 복장으로 입고 오세요’라고 했더니, 월요일 아침에 모든 사람이 캐주얼하게 입고 온 거예요. 저는 말 그대로 자유롭게, 정장을 입든 뭘 입든 개인의 선택에 맡기겠단 이야기였는데 ‘아, 이제부터 양복은 입으면 안 되는구나. 이건 상사의 지시사항이구나’라고 군대처럼 받아들인 거죠. 조직 문화에 대해 다시 생각했던 계기였어요.”

그가 하이트진로에 자리를 잡은 지 3년 7개월 남짓. 그사이 정장 슈트를 입은 이들과 청바지에 힐을 매치한 직원들이 자연스레 공존하게 된 것처럼 또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 바로 보고 문화. 그는 여러 단계를 거쳐 올라오는 보고서를 없애는 대신 ‘카톡’으로 대치했다. 임원은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솔루션을 내리는 사람이라는 믿음에서다. “서류로 ‘보고’하려 하지 말고 꼭 필요한 건 카톡으로 그때그때 상의하자고 제안했어요. 처음엔 다들 어색해하더니 이젠 시도 때도 없이 ‘카톡카톡’ 하고 울려서 제가 곤란할 만큼 자유로워졌죠. 전엔 ‘우리 밥 먹읍시다’ 하면 다들 ‘네’ 하고 나오기에 그런가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선약을 취소하고 나왔던 거예요. 근데 요즘은 ‘저 약속 있는데요’ 그래요. 꽤 시간이 걸렸지만 저는 이런 게 참 좋더라고요.”

아이
커리어의 위기? 솔직히 별로 없었다. 승승장구하며 커리어를 이어온 그가 직장에서 맞닥뜨린 위기는 오히려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해서도 나름의 대처 방식은 있다. “우선 싫으면 싫다고 이야기해요. 그러고도 전혀 개선이 안 되면 이해하려고 노력해요. 근데 그것도 안 되면 아예 부딪히는 걸 최소화하는 거죠. 요즘은 자식을 키우면서 가치관도 변하고 사람에 대한 이해도 넓어졌어요.”

그는 중학교 2학년짜리 아들이 하나 있다. 육아에 있어 부모님의 도움을 받았기에 가능한 부분이긴 했지만, 아이와 회사 문제는 늘 구분해서 본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 때문이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아이야말로 나를 어른으로, 조금 더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줬어요.” 아이를 키우면서 비판적이고 시니컬한 성격은 물론 이기심도 많이 사라졌다. 여전히 육아는 풀리지 않는 숙제지만 그는 아이와 함께 나날이 성장한다.

  • 그의 책상엔 언제나 ‘신상’ 주류가 가득하다. 메모용으로 애용하는 아이패드와 자주 착용하는 펜던트 목걸이.

현재
일하는 40대 여자로서의 즐거움? 사실 힘든 게 더 많다. 일단 몸이 문제다. 누구나 겪게 되는 현실적인 부분들. 야근을 해도, 술을 먹어도 예전 같지 않으니 삶의 질이 조금씩 달라진다.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도 마찬가지죠. 저는 다를 줄 알았는데 외모의 변화를 실감한다는 건 역시 쉽지 않아요. 더 고민인 건 커리어에 대한 딜레마인데, 굳이 그래프를 그리자면 이제 내리막 그래프가 시작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50대까지 직장을 다닌다면 어떤 모습일지 고민도 되고, 어떻게 나만의 것을 설계할지에 대한 생각도 많아지고.”

요즘 가장 자주 하는 생각은 가치 있는 삶에 대한 고민이다. “내 인생에서 성공을 빼면 뭐가 남을까라는 생각을 해요. 결국엔 다른 이들이나 세상에 뭔가 작은 보탬이라도 될 수 있는 그런 삶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고 싶어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봉사가 아니라 제 마음이 풍족해질 수 있도록.”

그의 사무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크고 작은 그림 액자와 책들.

휴식
다시 전력 질주하기 위해서라도 가끔은 숨을 돌려야 한다.
그는 첼로를 연주하는가 하면 사회인 야구단에 가입해 마운드에 서기도 한다. 사무실 한쪽에는 2011년 하이트볼 챔피언십 개막전 시구에 나섰던 사진이 액자 속에 담겨 있다.

3년 전쯤부턴 플라멩코도 배웠다. “탱고는 남자가 있어야 출 수 있는 데 반해 플라멩코는 혼자서도 출 수 있어 멋있어요. 일단 음악이 좋고 에너지가 넘치죠. 플라멩코 단원이 되는 건 어떻겠냐는 소리까지 들었어요.” 직접 몸을 움직이는 스포츠나 흥겨운 술자리도 에너지를 주지만, 그에게 진짜 휴식을 주는 건 혼자 있는 시간이다.

“주 중엔 계속 약속이 있는 데다 주말엔 골프도 쳐야 하고 아이도 봐야 하죠. 그러다 보니 혼자 있거나 조용히 TV를 보는 식의 작은 평화야말로 제게 진정한 휴식이에요.”






신은주에게 배우는 커리어 노하우
1 결정의 기술

“결정도 연습이에요. 해볼수록 는다는 거죠. 저 역시 광고 회사에 다니던 무렵 광고주의 결정을 보며 ‘아, 이건 나쁜 결정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비교적 좋은 결정을 내리는 확률이 높아졌고 결정도 빠른 편이에요. 가끔 어떤 결정이 옳은지 혼란스러울 땐 객관화를 많이 해요. ‘내가 임원이 아니라 누군가를 컨설팅해 준다면 어떤 결정을 하라고 말할까?’ 같은 식으로.
가끔 강의를 할 때 ‘인사이트’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많이 받는데, 저는 특별히 분석하지 않아도 처음 받았던 인상이 바로 결론으로 이어지는 걸 인사이트라고 생각한다고 답해요. 그 바탕엔 ‘신기’도 아니고 ‘감’도 아닌 사고의 연습이 있다는 거죠.
프레젠테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 역시 ‘말발’이 아니라 ‘생각발’이라고 봐요.”

2 관찰의 기술
“관찰하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걸 좋아해요. 특히 말하는 방법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보죠. 자주 사용하는 단어는 물론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방식, 눈빛 등등. 똑같은 내용이라도 직접화법을 쓰는 이와 간접화법을 즐겨 쓰는 이들은 스타일이 다르죠. 그런 것만 봐도 어떤 사람인지 알겠더라고요. 개인적으론 직접화법을 구사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관상에도 관심이 있어서 1년쯤 따로 공부하기도 했어요.”

3 설득의 기술
“저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를 꼽자면 누군가에게 제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고, 마음먹으면 결국 설득해 낸다는 거예요. 좀 구닥다리 이야기 같지만 설득력의 베이스는 역시 진정성이겠죠.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말해 본인이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고 내가 원하는 쪽으로 유도하는 거죠. 부서 이동을 지시할 때도 ‘내가 너를 지켜봤는데 너의 강점은 매니지먼트 능력보다는 발로 뛰는 적극성에 있다고 생각해. 그 적극성이 더 발휘될 수 있는 포지션을 생각해 보면 어떻겠니?’라고 말하는 식이죠.
대화는 자기 머릿속에 있는 걸 이야기하는 것이니 끝이 없어요. 듣는 상대가 생각을 바꿀 수 있도록 팁을 주는 게 가장 중요해요.”


신 명 은
제일모직 전무, 빈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1965년생
1991년 이화여대 패션 디자인 석사
1987년 한주통산 GM
1997년 지엔코 디렉터
2007년 미국 South Pole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2011년 빈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고작 2년 차에 엘레쎄를 탄생시킨 이래 스포츠 리플레이, 써스데이 아일랜드, 엘록 등 열두 개의 패션 브랜드를 론칭한 패션 전문가. 지난해 런던 올림픽 국가 대표단의 유니폼을 탄생시킨 빈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남들이 가는 길은 일부러 피해 가는 신명은의 부드러운 카리스마.



자주 수첩에 메모하며 꼼꼼히 점검하는 스타일.

시작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이 가장 선호하는 건 여성복이다.
선택의 폭도 넓고 화려한 ‘크리에이티브’를 펼칠 수 있는 분야기 때문. 의상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그는 달랐다.

“남들처럼 여성복을 택하는 대신 스포츠 브랜드를 선택한 것이 첫 번째 터닝포인트였던 것 같아요. 어릴 때 기계체조 선수였던 데다 운동에 관심이 많아 더 잘할 수 있는 분야기도 했어요.”

1987년, 공채로 입사해 처음 커리어를 시작한 곳이 아식스였다. 1년쯤 후, 한주통산으로 회사를 옮기고 ‘엘레쎄’를 성공적으로 론칭해 냈다. 그가 탄생시킨 수많은 브랜드 가운데 첫아이쯤 되는 셈. 고작 2년 차가 브랜드를 론칭한 것도 놀라운데, 4년 차엔 디자인 실장이 됐다. 부끄러워서 실장이라고 부르지도 못하게 했다.

요즘 패션계를 떠올려도 지극히 드문 경우고, 당시 여성복으로 간 친구들은 거의 막내 취급을 받던 무렵이었다. 초고속 승진은 그 후로도 계속됐다. 지앤코로 이직 후, 7년 차 때는 MD를 비롯하여 기획 총괄 업무를 맡았고, 9년 차엔 브랜드 매니저가 됐다.



트렌드를 예측하고 분석하는 일이야말로 업무의 핵심. 사무실 벽에 붙어 있는 트렌드 자료.

실패
승승장구를 거듭한 그의 커리어에도 딱 한 번이지만 실패가 있었다. “‘캐너비’라는 브랜드였어요. 진과 패션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콘셉트로 비어 있는 시장을 공략한 단계까진 순조로웠어요.
그런데 점점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거예요. 치열하게 고민했죠. 1년 혹은 2년 후 어떤 모습으로 바뀔 것인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결론은 브랜드를 과감히 접고 당시 성공을 거두고 있던 다른 프로젝트에 힘을 쏟아야겠더라고요.

제가 론칭하고 제가 접는다고 하니 오히려 사장님이 깜짝 놀라며 말리셨지만 과감히 접었어요.”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 리더로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해도 팀을 해체하고 함께한 직원들을 떠나보내는 과정은 쉬울 리 없었다. 그 후 함께 맡았던 다른 브랜드에서 더 큰 성공을 거뒀지만, 처음으로 직업에 대한 회의를 느꼈던 순간이기도 하다.

딜레마
커리어의 시작도, 전공도 디자인이지만 그는 항상 숫자와 비즈니스에 강했다. “한때는 디자이너로서의 딜레마이기도 했지만, 그래서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누군가는 나를 보고 그저 ‘비즈니스하는 사람이야’라고 말할지 모르죠.

하지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역할을 맡고 있는 지금도 시장을 고려하지 않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건 패션이 아니라 자기 예술 아닌가요?” 스포츠 브랜드로 첫 커리어를 시작한 데는 입을 수 없는 옷에 대한 거부감도 한몫했지만, 다른 디자이너들에 비해 탁월했던 분석력이 확실한 강점으로 작용했다. 어렸을 때 옷을 직접 만들어 입히시던 어머니의 영향 아래에서 자라 기본적으로 패션을 사랑하지만, 숨겨진 니치 마켓을 찾고 비즈니스 모델을 확립해 공략하는 재능이 늘 한 수 위였던 셈이다.

  • 모니터에 붙어 있는 메모는 그의 오랜 신조나 마찬가지.

뉴욕
“2006년쯤엔 이러다 해외 브랜드에 우리나라 시장을 모두 뺏기겠다는 위기의식이 들었어요. 백화점 바이어들을 만나 국내 브랜드는 다 없어지겠다며 협박도 하고 매국노라며 싸우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세상의 흐름을 거스를 순 없겠구나.’ 그래서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미국으로 떠났어요.”

당시 학생이던 딸과 단둘이 이민용 트렁크 두 개를 가지고 뉴욕으로 떠났다. “다 말리는데 너무 용감하게 떠난다니까, 남편마저도 오히려 뭔가 있나 보다 했대요. 사실은 떠나기 직전에 가서 하려던 일자리 자체가 무산되어 아무 대책 없이 간 건데 말이죠.
심지어 도착해 보니 인터넷으로 예약해 둔 숙소마저 공사 중이었어요.”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이틀 만에 살 집을 구했고, 3개월 만에 사우스폴이라는 회사에 취직도 했다. “다 되더라고요.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되죠. 내가 가면 길이 된다는 게 나름의 철학이에요.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차별성을 얻기도 힘들죠. 전 일등만 살아남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남이 안 가는 길로 가서 살아남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남들 가는 길로 가봤자 영원히 2등밖에 안 될 테니까요.”

아이
이제 대학생이 된 딸은 엄마가 맡은 브랜드에 대해 거침없이 의견을 피력하는가 하면, 엄마처럼 패션 쪽 일을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지금 같은 순간이 오리란 상상을 할 수도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처음 아이를 가졌을 무렵, 회사에선 이미 디자인 실장을 맡은 상태였고 대학원까지 다니고 있었다.

“정말 이 악물고 일하며 아이를 낳고 대학원을 졸업하는 과정을 견뎌냈어요. 우선 포기한 건 돈이었어요. 지금 번 돈이 육아 도우미에게 다 나갈지언정 이건 딸과 내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하며 악착같이 일했죠. 과로로 세 번이나 허파가 터졌어요.
성공에는 결국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그에겐 항상 일이 우선이었다. 가족은 내 편이니 나를 기다려줄 수 있고 이해해 줄 수 있지만 세상과 일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사회생활 하면서 절대 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아이 아파서 회사 못 간다는 핑계는 대지 말자였어요. 두 번째는 여자이기 때문에, 아이 엄마이기 때문에 어떤 일에 빠져도 된다는 이미지는 회사에 절대 심어주지 말자. 세 번째는 집에 와서 힘들다고 말하지 말자. 이런 말 해 봤자 돌아오는 반응은 결국 ‘그만둬’거든요.”

  • 유리벽에 다양한 메모가 가득한 사무실 풍경.

도전
“사실 삼성 계열, 제일모직이라는 곳에 온 것 자체가 제겐 굉장한 도전이에요. 새로운 브랜드를 론칭해 오다가 빈폴이라는 기존의 브랜드를 맡는 일 또한 어렵긴 마찬가지였어요. 시스템이 공고한 만큼 의사결정 또한 쉽지 않았거든요. 그렇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죠. 아, 25년이나 된 브랜드인데 내가 급하게 혼자 뛴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 손잡고 뛰면 멀리 갈 수 있겠구나. 50년, 100년 동안 살아남을 브랜드로 만들려면 조금 천천히 가야겠구나.”

그는 지금 빈폴을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브랜드로 키우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차근차근 실천하는 중이다. 지난 런던 올림픽 당시, 국가 대표 선수단 전원에게 일일이 맞춤 슈트를 만들어 입힌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마침 에버랜드와 합병이 되는 변화의 시기인 만큼 패션과 레저와 엔터테인먼트가 만나 또 다른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아요. 더 즐겁고 재미난 콘텐츠들을 잔뜩 만들어낼 수 있도록 팀원들을 이끄는 건 지금까지처럼 저의 숙제겠죠. 패션은 언제나 즐거워야 해요.”

신명은에게 배우는 커리어 노하우
1 차별화의 기술

“가장 싫어하는 게 ‘벤치마킹’이에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결국 잘되는 걸 따라 하는 거잖아요. 브랜드를 론칭할 때마다 시장에서 가장 잘나가는 건 아예 제치고 시작했어요. ‘요즘 고객들’이란 말로 쉽게 단정 짓지 않으려 하고요. 언뜻 잘나가 보인다 해도 모두의 취향은 아닐뿐더러, 결국 5년 뒤나 10년 뒤엔 어떻게 시장이 바뀔 건지도 고민해야 남들과 다를 수 있죠.”

2 예측의 기술
“예측 능력은 결국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고 봐요. 패션도 마찬가지예요. 정부의 정책부터 경제 지표들까지 소비자들의 심리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거죠. 남들보다 어떤 현상의 ‘이면’에 대한 관심이 많은 편이에요. 막내 시절에 똑같이 시장 조사를 시켜도 저는 단순히 디자인만 보는 게 아니라 우리의 경쟁 브랜드 특징은 어떻고, 우리만의 뭔가를 해야 이길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식이었어요. 늘 현상의 이면에 대해 생각했어요. 그런 게 쌓이다 보니 어느덧 시야가 넓어지고 남들보다 더 멀리 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3 리더십의 기술
“제가 화내는 걸 일 년에 한두 번도 못 보는 이들이 대부분일 거예요. 꼭 화를 내지 않아도 카리스마는 충분히 보일 수 있다고 믿어요. 제 원칙 중 하나가 진짜 혼나야 할 일은 혼내지 않고, 오히려 혼나지 않고 넘어가도 되겠다 생각하는 일에 무섭게 혼을 내요.
설사 큰 손해를 입혔다고 해도 일을 하다가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실수라면 절대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거예요. 리더로서 그런 순간 ‘백업’해 주지 못하면 팀원들이 소극적이 되고 아무도 모험을 하지 않죠. 그에 반해 자잘한 실수에 대해선 크게 혼을 내요. 그거야말로 본인이 집중하지 않거나 게을러서 생기는 결과니까요.”


최 연 아
한국릴리 상무, 대외협력부 부서장

1976년생
1999년 경희대 약학 학사
1999년 삼일제약 입사 2001년 한국릴리 입사
2011년 ‘올해의 블랙 벨트 상’ 수상, 한국릴리 인사부 부서장(상무 승진)
2013년 한국릴리 대외협력부 부서장

그는 ‘위기’라는 단어를 쓰지도, 힘들었다고 푸념하지도 않았다. 다만 지나칠 정도로 ‘열심히’했고 ‘재밌었다’고 말했다.
35세의 나이로 세계 10대 제약 회사 일라이 릴리 한국 법인의 상무가 된 최연아. 그는 이상하게도 ‘변화’에 집착했다.


입사
경희대 약대를 졸업했다. 사실 원한다면 조그만 약국에 월급쟁이 약사로 들어가 보통의 회사원보다 많은 연봉을 받으며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약사고시를 앞두고 병원, 약국, 대학원 그리고 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많은 지원하지 않는 ‘제약 회사’라는 옵션 중 그가 택한 것은 제약 회사의 ‘월급쟁이’였다.

“가장 재밌을 것 같았어요”라고 웃으며 말하기에, 일을 재미로 하냐고 묻자 “그럼요. 일은 재밌어야 하는 거예요”라고 답한다.
일이 너무 재밌어서 10시 넘어서까지 계속 야근을 해도 피곤한 줄 몰랐다고.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같은 학교 같은 전공의 남학생과 사귀고 있었는데, 결국 그 남자가 남편이 되었다.
그럼 세상에서 가장 편하다는 부부 약사를 하면 좋지 않았겠냐고 묻자, 그는 “재미없잖아요”라고 말한다.

이직
최연아 상무도 국내 제약 업체에서 일할 때는 상사가 퇴근을 안 하면 남아서 눈치를 보곤 했다. “그땐 그런 게 당연한 건 줄 알았어요.” 일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과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싶은 마음 사이에 고민이 생기면서 이직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과 가정을 동시에 꾸리기 위해 좀 더 합리적으로 시간을 운용할 수 있는 직장을 선택한 것. 국내 제약 업계에서 외국계 제약 업계로 옮기는 건 근무 여건뿐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봐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직은 별다른 계기나 갈등 없이 자연스럽게 이뤄졌지만, 결과적으론 그의 인생에 커다란 터닝 포인트가 됐다. 릴리가 앞으로의 커리어에 큰 힘이 됐으니까.
“둘째를 임신했을 때 입덧이 심했어요. 주말에 쉬고 출근하면 월·화는 견디겠는데 수요일을 넘기기가 너무 힘들더라고요.
출산 휴가 전에 약 3개월은 수요일마다 집에서 일했어요. 그런 작은 배려들이 여성이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 같아요.
국내 기업에 있었으면 아직 임원이 되지 못했겠죠.”

  • 이번 달부터 마지막 주 금요일을 '패밀리데이'로 정해 전 직원이 오후 3시에 퇴근한다.

변화
최연아 상무는 변화에 대한 집착이 심하다.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한 일 년 동안은 아이 키우랴 일하랴 정신없었는데, 이내 익숙해지니까 지루함이 느껴졌어요. 뭔가 도전적인 일을 하고 싶어 안달하는 제게 남편이 새로운 걸 자꾸 찾는 것도 ‘집착’이라고 꼭 짚어 말하더군요.” 같은 업계라도 좀 더 ‘빡센’ 회사로 옮길까를 고민하던 그에게 때마침 회사에서 변화를 던져줬다.

글로벌 단위의 ‘식스 시그마 블랙 벨트’ 업무를 제안한 것(‘식스 시그마’는 모토롤라에서 처음 고안한 것으로, 각 업무 절차와 공정을 통계적으로 수치화해 점검한 뒤 향상을 꾀하는 일종의 경영 메소드를 일컫는다. ‘블랙 벨트’는 이 경영 전략을 수행하는 기구 중 하나다). 그때까지 임상 업무만 해오던 그에게 ‘경영’은 새로운 개척지였지만, 때마침 변화를 갈구하던 터라 마다할 리가 없었다.
그는 이 업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유럽과 북미를 제외한 지역에서 최초로 릴리 본사 회장에게 상을 받기도 했다.
결국 이 변화가 임원으로 승진하는 데 큰 계기가 된 것.

위기
위기라는 단어를 쓰진 않았지만 분명히 그건 그의 인생에서 위기였다. 성과를 인정받아 ‘인사 부서’의 디렉터(상무)가 된 것은 좋았으나, 자신의 업무 영역만 책임지면 되는 중간 관리자와 달리 부서와 팀 전체를 총괄하는 임원의 자리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게다가 그 즈음에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엄마의 역할 역시 더 중요해졌다.

“사실 제 나이에 임원이 된 것이 능력제 승진 시스템 덕분이라면, 임원을 계속하게 도와준 건 가족이에요.” 아이들을 돌봐주는 도우미가 집에 상주하고 친정엄마도 하루에 꼭 한 번 들러 아이들과 집안일을 챙겨주지 않았다면 지금에 이르기 힘들었을 거라는 얘기다. 게다가 약국을 경영하는 남편과 시댁 식구들까지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고 있는 상황이다. 생각해 보면 이런 도움 없이 여자가 사회에서 유리 천장을 깨고 끝까지 올라가기란 쉽지 않다.

  • 직원들의 휴식 공간은 카페처럼 아기자기하다. 일회용 컵은 쓸 수 없고, 개인 잔을 사용한다.

가족
일을 시작하고 재미를 붙이면서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만나던 남편과의 결혼을 자꾸 뒤로 미루게 됐다. “뭔가 다른 일이 생길 거라고 기대했나 봐요. 그런데 아무 일도 없더군요. 그때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는 일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가 절대 후회하지 않는 단 한 가지가 아이를 낳은 일이란 말에, ‘아이가 있어서 좋은 건 뭐냐’는 우문을 던졌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말도 안 통하고 내가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베풀어야 하죠. 가끔은 나만의 시간이 필요해서 몰래 휴가를 내고 밖에서 하루 종일 놀거나 친구들을 만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서서히 말을 하고 저를 이해하며 대화가 가능해지면서 아이들에게 받는 것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이제는 오히려 아이들이 자신의 스승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부끄러운 마음이 들 때 아이들을 바라보면, ‘아이들 보기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지’라는 결심을 하게 된다면서.

현재
지금 그가 맡고 있는 대외협력부는 데이터를 분석하고 전략을 세우기도 하지만,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주요 업무다. 그의 부서는 크게 홍보팀과 약가협상팀으로 나뉘는데, 홍보팀은 프레스를 만나고 약가협상팀은 보건복지부를 상대한다. 경쟁사의 같은 포지션에는 20년 동안 관공서와 신뢰를 쌓아온 사람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도전심이 생긴다.
“그분들을 보면 외부 정보에 민감하게 촉을 세우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이제 시작인데 아직은 쉴 때가 아니죠. 이 업무를 앞으로 5~7년은 더 하고 싶어요. 그 후에는 글로벌로 진출하고 싶고요. 지금 같은 업무 강도로 적어도 50대 중반까지는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그 후에도 일은 하겠죠. 좀 쉬면서 하는 일 말이에요.”

  • 릴리는 정해진 자리가 없다. 임원도 마찬가지. 아침에 앉은 자리가 그날의 자리다.

최연아에게 배우는 커리어 노하우
1 휴식의 기술

커리어 우먼으로서 야근은 ‘절대’ 피할 수는 없는 일. 그러나 주말엔 일하지 않겠다고 자신과 가족에게 약속했다. 특히 워킹 맘으로서 가정을 화목하게 꾸리기 위해서는 금요일 밤부터 가족에게 헌신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금요일 밤에는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남편과 함께 와인 한잔하면서 꼭 함께 저녁을 먹어요. 아이들에게도 금요일 밤에는 늦게까지 놀 수 있는 여유로움을 주고요. 그날부터 주말까지 저는 온전히 가족의 것이죠. 회사도 이번 주부터 마지막 주 금요일을 ‘패밀리 데이’로 지정해 3시에 퇴근하라고 하니 참 다행이에요.”

2 리더십의 기술
“일단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나야 해요. 시스템이 완벽하면 어떠한 사람이 오더라도 100%의 성과를 낼 수 있죠. 그런데 뛰어난 인재가 오면 시스템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120~130%를 해낼 때가 있어요. 이런 사람이 와서 한 번 시스템의 기준을 확 끌어올려 놓으면, 그다음부터는 그 사람의 노하우를 모두가 배울 수 있도록 과정을 최대한 시스템화하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이 어디서 120%의 일을 해낼지 잘 살펴야 해요. 또 ‘치고 나가는 감각’을 갖춰야 해요. 요즘같이 불확실한 상황에선 가만있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데, 리더는 그러면 안 돼요. 리더가 안주하면 팀이 정체되죠. 이런 상황일수록 신속히 결정을 내려 방향과 비전을 제시해줘야 해요.”

3 관계의 기술
최연아 상무는 부하 직원을 ‘~님’이란 호칭으로 불렀다. 그런가 보다 했는데 부하 직원도 최 상무에게 ‘연아님’이라고 불렀다.
히딩크가 우리나라 와서 처음 한 게 국가대표 축구팀 선수들끼리 선배 호칭을 쓰지 말고 반말하란 거였다. “릴리는 원래 문화가 이렇습니다. 저도 일회용 잔을 쓰거나 커피 심부름을 시키지 않고 제 컵을 가지고 다니며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뽑아 마셔요. 책상도 정해진 자리가 없고요. 랩톱을 들고 다니며 그날그날 다른 자리에 앉습니다. 상무라고 사무실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에요.”

4 설득의 기술
“직책이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시간이 부족하고, 그러다 보니 참을성이 없어져요. 저도 지루하면 안 듣고 ‘결론부터 말하라’고 얘기하죠. 최대한 결론부터 먼저 말하고 예상 질문을 철저하게 준비해서 군더더기 없이 끝내야 합니다. 그러자면 만나기 전에 설득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얻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지를 꼼꼼히 생각해야 해요. 두 입장이 명확히 이해되면 그때부터 큰 그림을 그리고, 서로의 입장을 꼼꼼히 짚어가면서 설득의 스토리를 만듭니다. 이야기는 최대한 솔직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끌어내고, 상대방에게 질질 끌려가지 않아요.”


오 혜 원
제일기획 상무, 이그젝티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1972년생
1994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영문학 학사
1994년 제일기획 공채 입사
2005년 제19회 한국광고대회 문화관광부 표창
2006년 칸 국제광고제 사이버 부문 한국 심사위원
2012년 칸 국제광고제 골든라이어상 수상

글을 쓰고 싶었던 대학생이었다. 카피라이터가 됐다. ‘가로 본능’과 ‘애니모션’으로 광고계의 역사를 새로 썼다.
그러고는 삼성 최초의 공채 출신 여성 임원이 됐다. 지난 20년간, 쾌속으로 질주해 온 그의 커리어는 알고 보니 “더 많은 광고를 해보고 싶다”는 욕심에서 비롯했다.


시작
1994년. 그는 두 장의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방송국 앵커냐, 카피라이터냐를 결정해야 했다. 기자의 꿈을 지켜왔지만, 광고 회사를 선택한 데에는 교수님의 조언이 컸다. “교수님이 제 얼굴을 보자마자 카피라이터를 하라고 하셨어요. 직업의 미래나 확장성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아무래도 TV에서 오래 일할 수 있는 얼굴이 아니라고 보셨던 거겠죠(웃음).”

제일기획에 들어 와보니 20명의 팀원 가운데 여자는 혼자였다. 말하자면 공대 아름이. 언제나 주목을 받았고, 무슨 말을 하든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 막 “맛으로 먹고 재미로 먹는 오리온 고래밥”이란 카피를 내놓은 그를 간절히 찾는 사람을 만났다. “당시 삼성전자 사장님이었어요. 광고 회의를 하면 보통은 사람들이 광고주 말에 이견을 달지 않아요. 눈도 똑바로 쳐다보지 않죠. 그런데 테이블 맨 끝에 앉아 있던 저만이 자기를 똑바로 쳐다보고, 자기 말이 틀렸다고 하더래요.” 그 일이 있은 후부터 그는 ‘노란 스커트’로 불렸다. 회의에서 광고주가 “그 노란 스커트 입은 직원을 데려오라”고 한 데서 유래된 별명.
휴대폰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그렇게 시작됐다.

  • 생일날 직원들이 써준 롤링페이퍼.

위기
시대가 변했고, 애니콜은 옛 이름이 됐다. 오혜원 상무도 애니콜을 떠나보내야 했다. “저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거죠.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이입했던 프로젝트여서 그런지, 이후에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태어날 때부터 했던 일을 어느 날 갑자기 못하게 된 것 같았다. 치열하게 살아온 시간이 피로감으로 찾아왔다. 오혜원 상무는 배짱을 부렸다.

“회사에 연수를 신청했어요. 연수 계획서를 내고는 파리와 뉴욕에서 3개월씩 살았죠. 좀 두렵기도 했어요. 내가 하던 일을 다 놓고 떠나면, 다시 돌아왔을 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어쩌면 다시 광고 일을 할 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죠.” 파리에서는 매일 미술관을 갔다. 뉴욕에서는 매일 떨이로 파는 표를 사서 뮤지컬을 봤다. “남편과 아이와는 떨어져 지냈지만, 그래서 더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다시 돌아가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죠. 그 시간 덕분에 일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일을 오만하게 대했어요. 내가 잘하니까 나한테 맡기는 거고, 내가 해주는 거다 식으로요. 하지만 다시 복직한 후로는 일 자체에 경외심을 갖게 됐죠.”

회사로 복귀한 후, 그는 11번의 PT 경쟁에서 11번 연속 일을 따냈다. 휴대폰이나 TV보다는 규모가 작은 보험·치킨·맥주·과자 등의 광고였지만, 소중한 일인 건 마찬가지였다. 광고주가 늘어나면서 팀원이 늘었고, 그러면서 점점 규모가 큰 프로젝트를 맡게 됐다. 과거의 광고주들도 다시 그를 찾았다.

성과
오혜원 상무는 사실 기계치다. 그런데 그를 성공시킨 건 휴대폰과 컴퓨터, TV였다. ‘애니콜’ 광고만 약 8년을 담당했다.
‘가로 본능’이란 카피를 붙였고, 당시로는 엄청난 제작비였던 10억을 들여 이효리의 ‘애니모션’ 뮤직비디오 시리즈도 내놓았다.
“그때가 막 인터넷이 터지던 시대였어요. 사람들이 콘텐츠라는 개념을 갖기 시작한 때였죠. 광고가 단지 물건만 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즐기면서 트렌드를 찾아내는 가운데 제품의 기능을 발견할 수 있음을 입증해 보인 기회였어요.” 삼성이 스마트 TV 판매에서 7년 연속 1위를 기록할 있었던 데에도 그의 역할이 컸다. 광고의 수준을 높이는 동시에 영역 확장을 실험하면서 대중의 호응까지 얻었던 성과는 그를 삼성 최초의 공채 출신 여성 임원으로 승진시켰다.

  • 남편이 선물해 준 기타. 야근할 때 종종 연주한다.

조직
오혜원 상무는 지난 2011년 12월, 임원으로 승진했다. 더 많은 권한을 얻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책임과 권한을 나누는 시도를 하고 있다. “예전에는 제가 아니면 되는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아닐 때, 더 잘되는 것도 많더라고요. 결정의 키는 제가 쥐고 있지만, 프로젝트마다 제 ‘미니미’를 만들고 있어요(웃음). 그들이 가진 생각과 에너지가 제 것과 시너지를 이룰 때 더 많은 가능성이 열리잖아요.”

여성인 오혜원 상무를 팀원들은 종종 ‘아빠’라고 부른다. 굵직하게 일하고 디테일한 걸 잘 못 챙기는 스타일 때문이고, 회사 밖에 나가서 프로젝트를 따오는 모습이 수렵 시대의 남자 같기 때문이다. “먹을 걸 가지고 와서 다른 팀원에게 요리하라고 하는 거죠.
제가 좀 직설적인 것도 한 이유예요. 저는 속내가 따로 없어요. 앞에서 이야기하는 게 전부예요. 솔직히 좀 거친 면이 있죠.”

아이
오혜원 상무에게도 남편과 아이가 있다. ‘운이 좋게도’ 6개월씩 해외에서 살거나 365일 대부분을 야근으로 채우는 아내와 엄마여도, 그걸 이해해 주는 가족이다. “남편이 네덜란드 교포예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너무 좋아해요. 저보다 시간도 많고요. 아이가 어렸을 때는 친정엄마가 돌봐주셨어요. 외동딸인 제가 일하는 걸 좋아하셔서 많이 도와주셨죠.” 그렇다고 해서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 없는 건 아니다. 대신 그는 “미리 걱정할 필요 없다. 어떤 시기만 지나면 된다”라고 후배들에게 조언한다.

“저는 아이가 어릴 때 일하라고 해요. 엄마만이 꼭 가장 좋은 양육자는 아니에요. 오히려 아이가 어릴 때 일하고, 나중에 가서 문제가 생기면 그때 아이를 보는 게 나아요. 닥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는 게 여자들의 특징이기는 한데, 안 그래도 된다는 거죠.” 아이에 대한 죄책감이 사라진 건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갔을 때였다. 전문직 학부모로서 아이의 친구들에게 광고 제작자란 일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아이가 정말 자랑스러워했어요. 자기 엄마가 다른 친구들의 엄마와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일하는 엄마는 그런 자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해요.” 아이에게 엄마가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것도 필요하다.

“저는 일부러 더 과장해서 이야기해요. 엄마의 일은 인류를 구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내가 일을 해서 번 돈으로 너에게 좋은 걸 해줄 수 있다는 식으로(웃음). 그렇게 가족들이 알고 있으면 제 일에 함께 참여하는 상황이 되는 거죠. 그냥 매일 집에 늦게 들어오는 엄마로 인식시키면 안 돼요.”

  • 그의 수첩. 유튜브, 넷플릭스, 이베이 등에 대한 단상이 적혀 있었다.

미래
임원이라는 자리는 더 많은 걸 신경 쓰면서 일할 수밖에 없는 자리다. 오혜원 상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과거보다 더 단순해졌다. 이 일을 얼마나 더 오래 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잘할 수 있을까? “이제 제가 제지당할 일이 없잖아요. 예전과는 다른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새로운 일의 기회도 더 많이 찾을 수 있죠. 그래서 지금부터가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시기인 거예요.
옛날에는 남들도 일을 하니까 나도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일이 저한테는 진짜 에너지가 되고 있어요.”
그럼 만약 광고 일을 그만둔다면? 그는 “별다른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마도 글을 쓰게 되지 않을까란 막연한 예상뿐이다. “그만두더라도 일단 후회는 없어야죠. 그러면 회사 정문을 가볍게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문 밖을 나갔을 때, 하고 싶은 일이 생각나면 그 일을 할 거예요.

오혜원에게 배우는 커리어 노하우
1 회의의 기술

“광고는 수치로 결과를 표현할 수 없어요. 그렇다 보니 제 결정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은 공정하지 않다고 여길 수 있죠.
그런 차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준을 밝혀야 해요. 최대한 많은 사람이 그 기준을 공유해야죠. 모두가 기준을 알고 있다면, 제가 어제 한 결정을 바꾸더라도 변덕스러운 사람으로 보지 않을 거예요.”

2 발상의 기술
“남의 걸 훔쳐야 해요(웃음). 책 보고 영화 보는 건 기본이에요. 아이디어는 화학작용이거든요. 다른 사람이 무심코 흘린 말이나 행동에서도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 있어요. 반대로 제가 흘린 말이나 버린 아이디어가 다른 이에게 정말 좋은 발상의 기회가 될 수도 있죠. 중요한 건 집중력이에요. ‘촉’을 세우고 있지 않으면 굴러 들어온 아이디어도 지나가버리니까.”

3 휴식의 기술
“바쁘기 때문에 저는 뭐든지 집약적이에요. 쇼핑도 남들은 3시간 걸릴 거 10분에 끝내고 뒤도 안 돌아봐요. 휴식도 비슷하죠. 장기적으로 멀리 가는 여행을 계획하기보다는 갑자기 오늘과 내일 시간이 나면 그 안에서 쉬고 놀 수 있는 데를 가요. 서울 시내의 호텔이나 친구 집이 될 수도 있죠. 그러지 않으면 계획만 세우다가 시간이 다 가잖아요. 그런데 저는 사실 비행기 안에 있을 때가 가장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시간이에요. 영화 보고, 책 읽고, 와인도 마실 수 있잖아요. 솔직히 어디서도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 게 제일 좋은 점이죠.”

  • 오혜원 상무가 칸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골든라이어 상패.

EDITOR : 박소영, 강병진, 박세회
PHOTO : 이승택

발행 : 2013년 16호

대기업의 임원이자 리더인 동시에 누군가의 엄마.조직과 가정을, 일하는 여자들의 문화를 변화시킨 4인의 멘토들.그들을 바꾼 결정적 순간과 커리어 기술들.

Credit Info

2013년 10월 02호

2013년 10월 02호(총권 16호)

이달의 목차
EDITOR
박소영, 강병진, 박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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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