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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On September 08, 2011

일찍이 무라카미 류가 위와 같은 표현을 썼을 때 문장 그 자체로 유려할 순 있으되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상상력에 불과하다 생각했더랬다. 일찍이 <시암 선셋>이 입증했듯 레드든 블루든, 벌겋게 또는 시푸르게 이글거리는 색감만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지 않던가. 하지만 강예원을 만나보고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때로는 새하얗다 못해 투명한 백지장이 강렬한 색감을 발산할 수도 있다는 것. 그 해맑은 흡수력 덕분에.



맞다. 내겐 비밀스러운 편견이 하나 있다. 이쯤에서 솔직한 고백 한 자락 하고 넘어가자면 매달 적게는 한두 개, 많게는 서너 꼭지에 이르는 인터뷰를 해대지만 마음에 드는 인물, 또는 멘트를 만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심지어 치기 어렸던 시절에는 ‘앞으로 나이 마흔이 넘지 않은 사람과는 제아무리 유명해도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는 말도 안 되는 결심을 품기도 하였으니 말 다 했지. 그러고 보니 하정우, 김강우 정도를 제외하곤 지금껏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청년(?) 인터뷰이가 그리 많지 않은 걸 보면 그 생각이 그닥 틀린 것 같진 않기도. 하지만 일찍이 파블로 네루다가 격정적으로 토로했듯 인생이 어찌 마음먹은 대로만 흘러가던가?
편견은 하나 더 있다. 그 사람의 삶이 곧 배우의 연기력, 또는 연기의 폭을 결정한다는 것. 물론 배우 이문식이 짚어냈듯 아이돌 출신 배우의 장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억눌린 사회 분위기, 또는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을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 못한 1960년대産 또는 1970년대産에 비해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데 너무나도 익숙하기 때문에.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로 굴러가기 시작한 지 오래인 이른바 ‘어번 라이프’에 인큐베이터를 대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12시간 내내 방통대 지하수조를 청소한 대가로 현금 5만원을 받아 든 채 흥겹게 담배를 찾아 물다 잔디밭에 둘러앉아 게임을 즐기는 일군의 청년들이 시선에 잡힌 순간, 30대 이문식의 뇌리를 스쳤던 그 회한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생생한 경험 그 자체가 아니던가.
언제나 그렇듯 결국 편견은 깨지라고 있는 것일 테다. 순백을 넘어 백치에 가까웠던 나타샤가 결국 백석의 사후, 그의 시 세계를 구원했듯 굳이 혼탁한 세상사에 몸담지 않더라도 순수한 호기심과 해맑은 성정만으로도 사람들에게 감명을 줄 연기를 토해낼 수 있을 터이니. 아니, 최소한 그 가능성만이라도 발견할 수 있었으니.

내가 남자이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여배우를 처음 만날 때면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거리감 같은 게 있다. 왠지 가운데 벽이 놓여 있는 것 같다거나, 뭔가를 숨기는 것 같다거나. 그런데 당신은 많이 다르다. 눈 속에 지금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아까 내게 살찐 것 같다고 했을 때 내 눈이 활활 불타올랐었나 보지?(웃음) 맞다. 정말 속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어릴 때 몇 번 거짓말을 해보려고 했으나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 어떤 상황에서도 그냥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고 솔직히 털어놓곤 한다.
첫인상은 무언가 텅 비어 있는 듯했는데 사진을 찍다 보니, 또 이야기를 하다 보니 너무나 다양한 색깔이 보여서 당황스럽다. 코믹, 슬픔, 섹시, 고양이 같은 앙칼짐까지 그야말로 버라이어티하다. 이유가 뭘까?
설경구 오빠가 내게 그랬다. 넌, 앞으로도 절대 철들지 말라고. 배우의 자질 중 하나가 철들지 않는 건데, 실제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거의 불가능한 덕목 중 하나라고. 그런데 넌 참 철이 없어서 좋겠다고. 그러니까 배우가 철이 들수록, 즉 생각이 복잡해질수록 연기는 더 꼬이고 어려워진다는 거다. 순수에 가까운 색깔을 확 뽑아내야 하는데 너무 많은 색깔이 침투하면 혼탁해진다고. 그 어떤 감독을 만나든 다른 색깔을 표현할 수 있는 백지장 같다는 거다. 그땐 내가 그렇게 생각이 없나? 고생 모르고 해맑게 산 티가 너무 많이 나나? 고민했었다. 그런데 내가 원래 그런걸. 누구에게건 좋은 말 많이 하려 하고, 밝은 에너지가 좋고, 웃고 있는 게 좋다. 내가 좀 더 망가지더라도 상대방이 웃으면 그냥 좋다.
부모님의 영향인가? 아니면 종교가 있든가….
어머니가 소녀처럼 해맑다. 그리고 어디 가서 욕먹는다고 사람들이 굳이 얘기하지 말라고 한 건데 어렸을 때 고생 거의 안 하고 자랐다. 물론 데뷔 후 5년 가까이 공백이 생기면서 시련을 겪긴 했지만.(웃음) 종교는 있다. 천주교고, 모태신앙이다. 그런데 친구들이 교회 가자고 하면 또 열심히 따라가서 기도한다. 난 하느님과 하나님이 왜 다른지 잘 모르겠다. 성경도 똑같고, 기도하는 대상도 똑같은데. 종교 전쟁만 없었다면 어차피 같은 내용으로 기도했을 것을. 물론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마구 나무란다.
 인터뷰 시작한 지 10분이 지나도록 이야기가 끊기질 않는 걸 보면 당신과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심심하지 않겠다.
맞다. 그래서 친구들이 많다. 어제도 친구 열댓 명과 함께 하루 종일 수다를 떨었다. 내 생일 파티에는 한 40명 정도 꾸준히 모인다.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를 가리지 않고 나를 중심으로 친구들끼리 서로 관계를 맺고 친해진다. 그래서 항상 바쁘다. 친구들뿐 아니라 매니저, 가족, 또 일하다가 만나는 사람들. 긴 공백기를 깨고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가장 좋았던 점은 ‘지금 내가 대세다’ 차원이 아니라 에너제틱하게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교류할 ‘거리’가 생겼다는 거였다. 그 충만함이 참 행복하다.
연기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대학에서는 성악을 전공했는데.
원래는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었다. 지금도 해마다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라보엠>을 꼭 보러 갈 정도로 오페라가 좋다. 그런데 나 같은 체구로는 노래를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노래로 하는 연기가 아닌, 말로 하는 연기를 해봐야겠다고 막연하게 꿈꿨다.



막상 연기를 하게 되니 무엇이 가장 좋던가?
좋기는커녕 힘들기만 했다. 물론 영화배우로 데뷔하고 연기하는 건 참 재미있었다. 처음 캐릭터가 나에게 200% 맞았을 때 온몸이 짜릿했던 그 카타르시스란. 그런데 한 번 두 번 지날수록 캐릭터에서 빠져나오는 게 점점 더 힘들어졌다. 심지어 정체성을 잃을 때도 있을 정도로. 연기가 끝나고 나서 옷을 갈아입기 위해 거울 앞에 서면 ‘나는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되뇌일 때가 많다.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난 지금 행복한 것인가 등등. 나답지 않게 별 철학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더라. 그래도 이번 <퀵>은 말괄량이 같았던 내 어린 시절과 똑 닮은 캐릭터라 연기하기도 쉬웠고, 빠져나오기도 쉬웠다.
<하모니>를 찍으면서는 정말 힘들었겠다.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불행과 절망을 한몸에 안은 아버지 살인범을 연기했었는데…. 캐릭터 분석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당연히 힘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분석이란 게 무척 빤했다. 일단 비슷한 종류의 사건들을 최대한 많이 조사해보고, 그런 사건의 후유증을 겪은 여자들의 사례, 치료법 등을 꼼꼼히 찾아봤다. 그다음에는 정신과 의사를 직접 찾아갔다. 실제 카운슬링에서 등장했던 대화들, 그녀들의 감정, 가정환경,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며칠 동안 묻고, 이해하고, 노트에 빽빽하게 필기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니 조금씩 그 캐릭터가 내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론 빠져나오는 데도 비슷한 시간을 소요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밖에 연기를 위해 또 어떤 노력을 기울이나.
더는 없는데…. 아, 다큐멘터리를 많이 보긴 한다. <인간극장> <현장출동 SOS> 이런 거. 무겁고 우울한 이야기를 왜 그렇게 많이 보느냐는 사람들도 있지만 보면서 많은 걸 깨닫는다. 사람은 다 그렇지 않나? 삶이나 사회적 위치, 명품 등 갖고 싶은 게 참 많다. 나도 마찬가지다. 항상 더 화려하고 싶고, 더 좋은 것 먹고 싶고, 더 많은 인기를 누리고 싶고. 그런데 우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가끔 망치로 두드려 맞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기나긴 공백을 뚫고 이 정도라도 누리고 있는 걸 행복으로 알아야지, 이런 생각 말이다. 조금 유치하긴 하지만 그런 깨달음을 얻을 때면 ARS 전화를 걸어서 남몰래 돈도 좀 부치고 그런다.(웃음)
사실 연예계에서 기나긴 공백이란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에 비견될 정도로 치명적이다. 어떻게 극복했나?
그냥 학교 열심히 다녔다. 아침 9시부터 운동, 사람 만나기 등 스케줄 빼곡히 잡아놓고 하루 종일 몸을 움직였고. 덕분에 다음 영화에서 ‘격투기’를 할 것 같은데 별 부담이 없다. 노래방 가서 ‘거위의 꿈’ 같은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만약 영화계에 복귀를 못했어도 불행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시집갔을 듯하니까.(웃음)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걸 자랑하는 건가?
어우. 착한 남자 있으면 소개 좀 해달라. 난 꼭 결혼하고 싶으니까. 똑똑하고, 능력 있고, 자상하고, 가족을 먼저 생각하고, 책임감 있고, 성실하고 다 좋은데 난 선하고 착하지 않으면 1분 1초가 불안하다. 그냥 무섭다. 착한 남자들이 많이 늘어나면 정말 좋겠다.
<퀵>에서 첫 주연을 맡았다. 이야기를 쭉 듣다 보니 하고 싶은 것도 참 많은 것 같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나.
힘들게 주연 자리에 올랐으니 해보고 싶은 배역, 마음껏 해봐야지.(웃음) <퀵> 반응이 좋게 나오고 나서 차태현 오빠와 밥을 먹으며 물어봤다. 앞으로 어떤 배역을 맡으면 좋겠느냐고. 이렇게 얘기하는 거다. 한참 동안 빤히 보고는 ‘너는 공포도 잘 어울릴 것 같아, 코미디가 되니까 로맨틱 코미디도 잘할 것 같고, 모자를 쓸 때는 사기꾼도 잘 어울리고, 그러고 보니 격정 멜로도 잘할 것 같네. 깡이 있어서 (하)지원이처럼 액션 연기도 소화할 것 같고. 넌 참 좋겠다, 할 게 많아서.’ 농담처럼 마무리되긴 했지만 차태현 오빠 한 사람이 5명에 버금가는 소중한 존재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다기보다는 현재 상태가 마냥 좋다. 딴 건 몰라도 인복 하나만은 제대로 타고난 것 같아서. 앞으로 그거 하나 제대로 관리하면서 살기만 해도 충분히 성공한 삶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일찍이 무라카미 류가 위와 같은 표현을 썼을 때 문장 그 자체로 유려할 순 있으되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상상력에 불과하다 생각했더랬다. 일찍이 <시암 선셋>이 입증했듯 레드든 블루든, 벌겋게 또는 시푸르게 이글거리는 색감만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지 않던가. 하지만 강예원을 만나보고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때로는 새하얗다 못해 투명한 백지장이 강렬한 색감을 발산할 수도 있다는 것. 그 해맑은 흡수력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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