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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에서 박찬호와 함께한 1박 2일

왜 느닷없이 박찬호에게 말을 걸고 싶어졌을까? 명절을 코앞에 둔 금요일 오후, 느닷없이 일본으로 훌쩍 떠나야겠다는 욕구가 뭉글뭉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사전 섭외는커녕 박찬호가 머물고 있다는 일본 미야자키 두산 베어스 캠프의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작정 짐을 꾸렸다. 한때 심장박동 수를 두 배쯤 빨리 뛰게 만들었던, 극심한 시련기에도 차마 브라운관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했던 `亂世의 英雄`. 박찬호를 찾아가는 길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UpdatedOn February 26, 2009

발단은 TV였다. 평소 잘 보지도 않는 리얼리티 오락 프로그램에 우연히 시선이 가 닿은 것이 화근이었다. 강호동이 진행하는 ‘야외 MT’ 형식의 그 프로그램에는 평소 상상도 못해 본 인물 하나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것도 팬티만 입은 채 계곡 얼음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며 이승기와 낄낄거리는 모습의 박찬호라니. 처음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동안 그는 오락 프로그램은커녕 공식 기자회견이 아니라면 스포츠 전문지의 인터뷰 요청에도 응하지 않는 인물이었던 탓이다. 지난 10년간, 이른바 ‘국민 영웅’이라 불리는 박찬호만큼 ‘핫’한 인터뷰이가 또 있을까. 기자 생활을 시작한 이래 1년에 두 번 이상은 꼭, 어림잡아 스물네댓 번쯤 공식 인터뷰 요청을 넣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No!’였다. 심지어 신혼여행이 끝난 뒤 일가친척에게 인사하러 한국에 잠깐 들어오는 스케줄을 긴급 입수하고 집 앞에서 본인에게 직접 읍소까지 해보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의 논리는 간단했다. 야구 선수는 야구로만 말한다는 것, 미국 현지로 찾아온다면 경기가 끝난 뒤, 야구에 대해서만 묻는다는 전제하에 모든 것을 다 말해주겠다는 것. 이후 인터뷰이 목록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가 이렇게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명절을 코앞에 둔 금요일 오후,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머릿속은 박찬호 생각으로 꽉 차 있었고, 예전부터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무엇보다 박찬호가 메이저리거로 화려하게 데뷔한 1990년대 중반부터 변함없이 품고 있던 의문 하나, 도대체 그는 왜 그렇게 중압감을 느끼면서 마운드에 오르는 걸까. ‘새가슴’이라는 비난을 들으면서까지 공 하나하나에 지나치리만큼 집착하다 컨트롤 난조를 일으키고, 일거수일투족 고국 팬들의 시선을 잔뜩 의식한 채 중압감에 눌려 살아온 것일까. 그 무엇도 괘념치 않는 ‘독고다이’ 정신으로 동시대를 주름잡았던 노모는 물론, ‘장인’이라는 수식어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이치로 등 개인적이며 ‘쿨’하기까지 한 일본인 메이저리거와 비교하면 그 차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얼마 전,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하면서 기자회견장에서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모습을 보면서는 솔직히 측은하다는 생각까지 앞섰다. 도대체 왜 한국이라는 나라는 선수 생활의 황혼기를 맞은, 서른일곱 노장 선수가 유종의 미를 찍기 위해 마지막 불꽃을 불태울 자유마저 마음껏 주지 않는가. “국가를 위해 마지막 봉사를 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멘트를 공개석상에서 서러운 눈물과 함께 토해내도록 만드는가 말이다. 그 지긋지긋한 ‘국가’라는 올가미에 흠칫 몸서리가 쳐졌다는 거다.

안다. 박찬호와 최초의 ‘코리안’ 메이저리거라는 타이틀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샴쌍둥이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나 또한 암울한 20대에 ‘메이저리그의 정복자!’라는 화려한 수식어 앞에서 심장박동 수가 두 배는 빨라지는 초현실적인 경험을 하지 않았던가. 박찬호의 영광과 좌절은 곧 우리 모두의 것일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더욱 혹독한 실망감과 비판을 그에게 퍼부어댈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어느덧 박찬호와 함께 30대 중반을 훌쩍 넘어버린 지금, 차분하게 그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무거운 짐을 이젠 그만 내려놓아도 좋다고, 과거의 영광과 좌절에 대해 옛이야기를 속삭이듯 툭 터놓고 가볍게 풀어놓아도 괜찮다고 말이다. 그와 동시대를 함께 살아온 남자로서, 그의 투구 하나하나에 희열과 좌절을 대입시키며 지난한 삶을 꾸려온 한 사람의 팬으로서 그런 솔직한 심경을 전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게 바로 한밤중에 부랴부랴 짐을 꾸린 이유다. 사전 섭외는커녕 ‘미야자키’라는 지명 이외에 두산 베어스 베이스캠프의 위치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를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불투명하건만 아무래도 좋다는 심정이었다. 무엇보다 미야자키에는 ‘제3회 에이 어워즈’ 수상자이자 <아레나>의 강력한 우군인 두산 베어스 김경문 감독이 떡하니 버티고 있지 않은가. 그 ‘빽’을 이용해서라도 어떻게든 박찬호와 대화를 시도해보고 싶었다.

도착한 첫날, 숙소 앞에서 보기 좋게 딱지를 맞았건만 이상하게도 기분 나쁘다거나 초조하지 않았다. 다음날, 훈련장에서 한 번 더 대화를 시도해보고 여의치 않다면 소풍 나온 기분으로 박찬호의 투구 장면이나 슬슬 지켜보다가 귀국하면 되겠지 하는 넉넉한 마음까지 일기 시작했다. 더그아웃에서 김경문 감독 곁에 바짝 붙어 훈련 장면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박찬호가 슬금슬금 낯선 이방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신경 쓰여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더그아웃으로 다가와 “딱 30분만입니다”라는 멘트를 던지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저절로 쾌재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김경문 감독의 충심 어린 조언과 함께 무려 2시간이나 이어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왜 한국도, 미국도 아닌 머나먼 미야자키까지 날아와 훈련에 몰두하고 있는가. ‘야구 선수’ 박찬호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유를 묻는 것이다.

그것 참 뜬금없는 질문이다. 당연히 현역 ‘야구 선수’로서 이번 시즌을 철저히 준비하기 위해서지. 왜 하필 두산 베어스 베이스캠프에 합류했는지를 묻는 거라면 김경문 감독과의 기나긴 인연 때문이다. 고등학교 선후배 관계이기도 하고, WBC 예선전에서 감독과 선수로서 깊은 교감을 나누기도 했고. 후배들과 같이 훈련하다 보면 내가 조금이나마 노하우 같은 걸 전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젊은 선수들과 같이 훈련하다 보면 나도 새로운 자극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고.

‘야구 선수’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그동안 기사들이 메이저리거로서 활약상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정작 ‘소년 박찬호’의 과거가 어땠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껏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긴데 사실 나를 야구로 이끈 건 ‘김경문 감독’이다. 아, 감독님이 곁에 있어서 띄우기 위해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웃음) 1977년, 김경문 감독이 공주고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어릴 때 동네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대로에서 전파상을 하던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선수들이 거리 퍼레이드를 펼치는 풍경을 본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내 기억으로는 인생 최초의 야구에 얽힌 에피소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프로야구가 탄생했는데 첫 해에 OB 베어스가 우승을 차지했다. 연고지나 마찬가지였던 고향 마을에서는 그해 최고의 이슈였다. 그 다음 해 학교에서 야구부를 뽑자 키와 덩치가 큰 편이었던 나는 당연히 야구부에 지원했다. 나뿐만 아니라 그 어떤 선수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잘하든 못하든, 한 사람의 야구 선수가 탄생한다는 건 한 나라의 야구 역사가 온전히 그의 유전자에 각인되는 과정인 거다.

김경문 맞다. 그래서 선배들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찬호가 어렸을 때 멀찍이서 지켜봤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프로야구 선수로 활약하던 당시, 후배들을 격려하기 위해 모교에 들른 적이 있었거든. 수십 명의 후배들이 한 줄로 쫙 늘어서 있는데 너무 잘생긴 선수 하나가 눈에 확 들어오는 거다. 그게 바로 찬호였다.(웃음) 미국에서 고단한 지도자 연수 과정을 밟을 때 나도 찬호 덕분에 큰 힘을 낼 수 있었다. 당시 떠오르는 스타였던 그의 경기를 보러 아이들을 끌고 무작정 경기장을 찾아간 적도 있었다. 연락도 안 하고 갔으니 당연히 내가 온 줄도 몰랐을 거다. 그런데 버스에 타기 직전, 팬들 틈에 섞여 있는 나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찬호가 한걸음에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야구’를 업으로 살아가는 동업자로서, 한국 야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야구인’으로서 많은 고민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때 일이 지금도 아스라이 떠오르곤 한다.

WBC 등 국제 경기에서 후배들을 채근하고 이끄는 역할을 맡아왔다. 지금도 젊은 선수들과 같은 숙소에서 지내고 있다. 그들과 부대끼면서 무엇을 느끼는지 궁금하다.

일단 후배들이 나를 너무 어려워하는 것 같아 걱정이다.(웃음) 미국에서는 일면식도 없는 아마추어 선수들이 무작정 조언을 구하고 싶다며 찾아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당당하게 와서 도와달라고 요구하는 거지. ‘야구’에 인생 전체를 걸고 있다는 점에서 당신과 나는 동지가 아니냐는 발상인 거다. 그런 점에서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후배들이 많지 않다는 건 조금 아쉽다. 솔직히 나도 어렸을 때는 선배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미국에 막 진출했을 때 피터 오말리 구단주가 그렇게도 나를 아끼고 챙겨줬다. 아직 능력이 검증되지도 않은 신인 선수에게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꼭 전화를 걸어 격려해주곤 했으니까. 그런데 나는 중압감에 눌려 그에게 감사하다는 전화 한 번 걸지 못하겠더라. 물론 영어를 잘 못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1년 가까이 흘렀는데 더 이상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통역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해 1분 동안 정말 “생큐! 생큐! 생큐!”만 외치다 끊은 적이 있다. 그 다음부터는 한결 마음이 편해져 더 적극적으로 조언을 구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요즘 ‘임태훈’이라는 후배를 주목하고 있다. 베이징 올림픽 예선전에서 주장을 맡았을 때 후배들의 방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문틈으로 ‘Tell me’라는 노래에 맞춰 격렬하게 춤 연습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에게 야구란, 좋아하는 춤 연습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미칠 듯이 좋아서 몰두하는 최고의 취미 생활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요즘 후배들은 누가 시켜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의지로 연습에 몰두한다. 술, 담배도 알아서 삼가는 분위기다. 야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야구 빠따’가 없으면 한없이 게으름을 피웠던 우리 세대와는 완벽하게 다른 유전자를 갖고 있는 거다.(웃음) 그건 곧 한국 야구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는 뜻이라고 본다. ‘임태훈’이라는 프로 3년차 후배로 대표되는 요즘 선수들은 앞으로 우리 세대를 뛰어넘어 더 큰 성과를 일궈낼 거다. 난, 그들에게 내가 체득한 노하우를 최대한 많이 전수해주고 싶다. 지난해 후반기에 활약이 저조했고, 결국 국가대표에서 탈락해 본선에 참여하지 못한 스물한 살의 젊은이에게 시련을 극복하고, 본인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야구를 통해 ‘인생의 참 맛’을 느낄 수 있도록 조언을 건네는 것이 내 역할이 아닐까, 생각한다는 거다.

언제고 꼭 한 번 묻고 싶었던 질문이다.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로 활약하는 동안 영광도 많았지만 쓰디쓴 좌절을 겪은 적도 많았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엄청난 중압감에 시달리곤 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14년을 버텨냈나? 국민들의 열광적인 성원도 오히려 말 못할 부담감으로 작용할 때가 더 많았을 텐데.

야구든, 인생이든 어차피 시련이 없을 순 없다. 오히려 독하게 시련을 겪어야만 ‘인생의 참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다시피 난 얼마 전까지 야구 인생 최악의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그 대단한 사이영도 700승을 하기 위해 500패를 해야 했고, 그 엄청난 그렉 매덕스도 종종 홈런을 맞는다는 것을, 무엇보다 위대한 선수들 모두 나와 똑같이 그라운드에 침을 뱉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마음이 편해졌다. 물론 조국과 국민은 지금도 큰 부담이다. 그런데 그래서 함부로 포기도 못하겠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외면할 때에는 그만두고 싶은 순간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도 같이 힘들어하는 일부 팬들은 여전히 곁에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줄 상처가 무서웠다. 그래서 결국 이를 악물었고, 지난 시즌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와서 깨달은 건데 아마 내가 끝끝내 실패를 했더라도 그들은 나를 끝까지 지켜주었을 것이다. 물론 재기에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이런 간단한 진리조차 결코 깨닫지 못했겠지. 기나긴 재기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내 마음이 편안해져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을 새롭게 배울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난 솔직히 우리가 당신에게 부당하리만큼 큰 부담을 안겼다고 생각한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너무나 큰 짐을 한 개인에게 떠안긴 게 아닌가, 싶은 거다. 첫 번째 코리안 메이저리거가 아니라, 두 번째나 세 번째였다면 오히려 부담 없이 경기에만 더 집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철이 든 이래 나는 언제나 ‘국가대표’였다. 미국 진출을 시작으로 언제나 내가 가장 처음이었고, 무엇이든 ‘최초의 코리안’이라는 수식어를 달아야 했다. (김)병현이가 뒤를 이어 받쳐줬을 때는 솔직히 얼마나 마음이 편하고 좋았는지 모른다. 사실 ‘최초’라는 수식어는 누구에게든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시행착오를 많이 겪을 수밖에 없고, 이런저런 기대 어린 시선 때문에 중압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도 불문가지다. 하지만 ‘최초’이기 때문에 남들이 누리지 못했던 혜택을 받은 것도 솔직한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최초의 코리안’이라는 수식어를 결코 떼버릴 수가 없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한국전쟁이 막 끝난 직후,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우수한 인재들을 미국과 유럽에 유학을 보냈다고 들었다. 낙후된 국가를 일으켜 세우려면 선진 문물을 빨리 익혀 한국 사회에 접목시켜야 했기 때문일 거다.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고생고생하면서 나라를 일으켜 세웠는지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과거사다. 맞다. 솔직히 대한민국은 아직 국력이 약하다. 일본의 이런 시골 마을에까지 건설되어 있는 전천후 야구장을 한국에서는 몇 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인프라도 부족하다. 하지만 내가 미국에 진출한 이래 유소년 야구 선수들이 메이저리그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이)승엽이가 아시아 최고 홈런 기록을 세운 뒤 우리도 일본이나 미국에 뒤지지 않는 야구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WBC와 베이징 올림픽을 지켜본 우리 후배들은 당연히 세계 최고를 목표로 야구를 하게 될 거다. 우리 세대는 ‘개인적으로 꼭 성취해야만 하는’ 성과물 이외에도 야구인으로 살아가게 될 후배들에게 전해줄 유전자를 준비해야 하는 사람들인 거다.

올해 꼭 이루고 싶은 바람이 있다면 무엇인가? 동양인 최초의 124승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하는 게 일차적인 목표일 것 같다.

물론 선수 생활을 가슴 벅차게 마무리짓고 싶다는 욕심은 있다. 하지만 ‘동양인 최다승’이라는 타이틀은 그야말로 큰 꿈의 일부분일 뿐이다. 어차피 누군가에 의해 깨질 수밖에 없는, 또 깨져야만 하는 과정인 것이다. 정말 최근에 와서 느끼는 건데, 그저 ‘야구’라는 게 무엇인지 충만하게 깨달을 수 있다면, 그걸 통해 ‘인생의 참 맛’이 무엇인지를 체감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솔직히 그런 생각도 들곤 한다.

‘제2회 에이 어워즈’ 수상자인 메이저리그 후배 김병현은 2년 전, 인터뷰 도중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찬호 형이요? 어휴. 정말 애국자예요. 뼛속 깊이 ‘한국인’이라는 유전자를 각인시키고 사는 사람이라는 거죠.”

난 여전히 박찬호가 왜 그렇게 중압감에 시달리며 고군분투했는지, 십수 년 동안 왜 ‘국가’라는 존재를 항상 의식하며 살아야 했는지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다만, 그가 겪었을 지난한 세월의 자취가, 끝끝내 좌절하지 않고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정진할 수 있었던 그 원동력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인터뷰가 끝난 뒤 박찬호는 다시 그라운드로 향했다. 후배들에게 캐치볼을 던져주면서 농담을 던지는 목소리가 저 멀리서 울려 퍼졌다. “공이 너무 센가? 이건 파울볼이다, 알지? 야, 딱 하나 정확하게 맞았네.”

박찬호는 어느덧 애초 30개로 예정되어 있던 캐치볼을 60개까지 늘린 것도 모자라, 전력투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서서히 땀에 젖기 시작한 얼굴은 그야말로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고.

최초’라는 수식어는 누구에게든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기대 어린 시선 때문에 중압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도 불문가지다. 하지만 ‘최초’이기 때문에 남들이 누리지 못했던 혜택을 받은 것도 솔직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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