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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나> 기자들의 詩 낭송회

On September 25, 2008

왠지 가을에는 시 한 수 읊조릴 수 있어야 할 것만 같다.겨울이 닥치면 또다시 감상 따위는 까맣게 잊고 살아갈지라도.<br><br>[2008년 10월호]

Editor 박지호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온 것은.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는.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무언가 시작되고 있었어.

파블로 네루다, 시(詩)

어느 날, 문득 머나먼 남미로 떠나고 싶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영화 <일 포스티노>에도
등장한 바 있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 한 편 때문이었다. 그렇게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시>라는 길고 긴 제목의 시집 한 권을 곁에 끼고, 1백20일 동안 널따란 대륙을 종횡무진했다. 물론 희대의 로맨티시스트이자 바람둥이였던 파블로 네루다의 삶을 조금이나마 따라 해보고 싶다는 욕심도 없진 않았으나 ‘진즉 스페인어를 배워둘걸’이라는 회한만이 가슴속에 대롱대롱 남았다. 박지호(35세, 피처 디렉터)

아픔에 하늘이 무너지는 때가 있었다.
깨진 그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르런 빛은 장마에 황야처럼 넘쳐 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서 떠갔다.
김광섭, 생의 감각

어려서 이 시를 읽었을 때는 그저 암기하느라 바빴다.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을 때 이 시를 다시 읽고는 ‘아픔에 하늘이 무너진다는 게’ 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헤매는 건 마찬가지. 조금 더 어른이 된다면 어쩌면 이 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지영(32세, 피처 에디터)

비누는 씨앗도 아니고 열매도 아니다.
아마 추운 밤 깊은 산속에 앉아 있으리라.
이승훈, 비누

당연히 비누는 씨앗도 열매도 아니다. 당연히 비누 따위가 산속에 앉아 있을 리 만무하다. 이중의 딜레마를 떠안고 추운 밤, 깊은 산속에 앉아 있는 비누라니. 놀랍도록 선명한 이미지다. 단지 거품 나는 비누일 뿐이지만, 내 머릿속 기존 관념을 보기 좋게 허물어뜨린다. 지극히 단순한 내 머릿속에서 이런 형이상학적인 해석이 도출된 것도 놀랍다.
성범수(34세, 피처 에디터)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기형도, 10월

아직 기형도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사람은 어쩐지 미성숙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여전히 <입속의 검은 잎>을 잃어버리고, 새로 사고, 처음 손에 쥔 것처럼 읽는다. 벌써 6번째다. 죽어라고 읽었는데 그때마다 똑같은 통증을 느낀다. 그리고 여전히 <10월>이라는 시 앞에서 맹인같이 더듬거린다. 모조리 부정하고 싶은 추잡한 과거가 불쑥불쑥 떠오를 때면 항상 이 구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위안을 얻었다. 그의 말마따나 ‘내 사랑하는 10월의 숲은 아무 잘못도 없어’서. 이기원(31세, 피처 에디터)

죽은 시인의 사회
시집의 효용성이 바닥에 떨어진 시대에 살고 있는 거, 맞다. 한때 칠레와 더불어 인구 대비 시인의 비율이 세계 최고 수준에 달했던 대한민국에 더 이상 시인이 살지 않는다. 이른바 ‘죽은 시인의 사회’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시는 딱딱하고 어렵다. 그래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에 낭송할 시 한 수쯤 갖고 있다고 해서 크게 손해날 건 없을 거다.

왠지 가을에는 시 한 수 읊조릴 수 있어야 할 것만 같다.겨울이 닥치면 또다시 감상 따위는 까맣게 잊고 살아갈지라도.&lt;br&gt;&lt;br&gt;[200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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