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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처음인 것을 알고 있다

남자의 순결 서약서는 비싸게 팔리지 않는다. 굳이 침대 시트에 뭔가를 묻히지 않아도 결국 들통 나게 돼 있으니 긴장하라. `첫경험`이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전이든 그 후든 여자는 피곤할 뿐이다.<br><br>[2006년 10월호]

UpdatedOn September 20, 2006

Photography 기성율 ILLUSTRATION 장재훈 Editor 성범수

만난 지 한 달이 넘었다. 일주일 만에 키스를 했다. 가끔 몸을 밀착해올 때마다 금세 단단해지는 것이 느껴졌던 때는 일주일이 넘어서였다. 너무 빠르달 수도, 늦는달 수도 없는 속도. 서른도 안 돼 남자를 만날 땐 그가 혹시 조루는 아닐지, 성욕이 부진하지는 않을지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또 서른이 다돼 남자를 만날 땐, 그가 처음일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아직 서른은 아니지만 임박하게 그 즈음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그를 만났으니까, 앞에서 언급한 ‘섹스’와 관련된 ‘기본적인’ 우려는 없었다. 굳이 우려가 있었다면, 혹시 변태는 아니겠지 하는, 보다 하이(High)한 레벨의 걱정이었다. 참고로, 스리섬이나 애널섹스의 판타지를 얘기한다고 해서 곧바로 변태로 몰아붙이지는 않는 레벨(?)은 스스로 갖추고 있다고 자부한다.
새벽의 고속도로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시내 제한속도 이상은 달리고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 1개월을 훌쩍 넘게 만나면서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서로 이런 대화를 나눠야 했을 때에는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뭔가 잘못돼가고 있어.
‘요새 너무 예쁜 펜션이 많대’나 ‘일이 늦게 끝날 것 같은데 심야영화나 볼까’, 혹은 ‘오랜만에 바람 좀 쐬고 오고 싶다’는 말은 힘겨운 마라톤 완주의 순간 직전에 외쳐주는 치어리더의 갚진 응원이다. 웬만큼 혈기왕성한 마라토너들은 치어리더의 응원조차 필요 없다. 완주의 즐거움을 알고 있는 이들의 머릿속은 99% ‘완주’에 대한 생각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당당히 대한민국 ‘1%’에 끼고도 남을 그는 눈치를 못 챘는지, 못 챈 척하는 건지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게. 요새 대학생들은 펜션으로 엠티 간다면서? 우리 때는 민박집에 묵었는데’나, ‘공포영화 나오면 가자, 심야영화로는 공포영화를 봐야지’, 혹은 ‘나두! 이번 여름휴가는 너무 짧아서 갔다온 느낌도 안 나’라고만 대답한다. 웃는 얼굴로 ‘그러게’라고 대답하지만, 뚜껑이 열리기 직전인 머릿속에선 다른 대답들이 입을 통해 나가기 위해 혈전을 벌이는 중이다. ‘나이 많아 좋겠다. 펜션은 대학생 말고 연인도 가는 데란 걸 아는 게 바로 나잇값 하는 거야’나, ‘네가 최고의 공포영화야’, 혹은 ‘그러니까 같이 가자고! 빨리 날 잡아야지 화제는 왜 돌려!’
얘기가 더 진전되기 전에 밝히자면, 그는 나보다 세 살이 적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 친구들의 경우를 보면, 남자를 만난 후 섹스를 하는 데까지 걸리는 기간은 길어야 한 달이다.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어린 남자친구와의 섹스 스토리를 하도 물어보는 통에 에로 소설이라도 한 권 써야 할 판이다. 나보다 적어도 한 달 전에 만난 남자친구의 페니스 크기를 자랑하는 친구 앞에서 난 견디지 못한 채 무너져버렸다. “대체 얘는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충격에 빠진 듯 과장된 표정을 짓던 그녀들이 다양한 진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가장 신뢰성 있는 진단은 이거였다. “예전 여자친구와 가슴 아픈 과거가 있는 게 아닐까? 예를 들어, 임신 중절이라도 했던 경험이 있다면, 첫 섹스를 하는 데 좀 신중해지지 않을까?” 그의 페니스가 너무 작아서일 거라거나, 삼각 팬티 수영복을 입느라 왁싱한 헤어가 아직 자리를 잡지 않아서일 거라는 진단은 그 가능성조차 생각하기도 싫은, 너무나 잔인한 진단이라 일단 무시하기로 했다. 삼각 팬티 수영복을 입는 남자라니. 내가 그런 남자를 사랑할 리 없다. 삽입은 안 해도 애무까지는 간다, 옷 밖으로 느껴봤을 때 그리 작은 것 같지는 않다는 초라한 변명이 키스가 감칠맛 나는 게 아니라 입술이 아플 정도라는 한탄으로 이어질 무렵, 그녀들의 길고 긴 진단도 끝이 났다. 친구들의 조언대로 무려 1시간을 투자한 끝에 옛 여자친구의 싸이월드 미니 홈피를 찾아냈다. 제길! 다이어리는 모두 일촌 공개다.
좀 더 단도직입적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고 느낀 것은 그가 마지못해 꺼낸 말 때문이었다. “노천탕이 너무 예쁜 펜션이 있다는데, 우리 주말에 갔다올래?”라고 얘기를 꺼내자 그가 한 청천벽력과도 같은 대답. “사귀는 여자랑은 결혼 전에 1박 이상 여행은 안 가기로 했는데.” 여행만 가면 싸우게 되고,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까지 보여야 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이란다. 진지하게 덧붙인 말이 더 가관이다. “난 사랑하는 여자는 지켜주고 싶더라.” 만난 지 2개월인데 벌써 사랑이라니. 그리고 2년이나 넘게 군대에 보내 남자답게 훈련시키는 것은 나라를 지키라는 거지 ‘여자의 순결’을 지키라는 의미는 아니란 말이다. 그의 가장 큰 문제는 이거다. 그는 키스하고 애무하면서도 ‘섹스’와 관련된 화제조차 꺼내지 않는다. 심지어 내 과거에 대해 물어보지도 않는다. 그의 방에 단둘이 있을 때도 입술이 아플 때까지 키스만 했다.
필연적으로 술이 개입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본능이었다. 그가 대는 이유는 도저히 믿기 어려웠으니까.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그가 털어놓게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이 섰다.
출근 걱정 없는 금요일 저녁, 운전 걱정 없는 그의 동네 근처에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3년이나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다면서. 그럼 걔랑도 여행을 안 갔단 말이야? 그럼 3년 동안 여름휴가도 같이 안 갔다고?” 그러자 슬슬 답변을 피하던 그가 화살을 나에게 돌리려고 시도하기 시작했다. “너는 옛날 남자친구랑 여행도 잘 다녔나 보지?” 참고로 난 술을 좋아한다. 거사를 앞두고 자제하고 자제했지만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안달하고 있는 스스로가 서럽기 시작했고, 슬슬 취해갔다. 그러다 X파일-ex(boyfriend) File-을 들춰내는 과오를 범하는 순간까지 왔던 것 같다. 물론 그 와중에도 넘버를 다 불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 반 정도는 실토하고 말았다. 얄밉게도 그의 취조와 나의 실토가 끝을 보이는 시점에 그가 피곤하다며 이제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택시 안. 차마 여자친구들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창피한 일을 술김에 하고 말았다.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에 그만 울어버렸던 거다. 하지만 나름의 수확은 있었다. 택시 안에서 당황한 그는 나에게 드디어 약속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번 프로젝트만 끝나면 1박 2일로 여행가자.”
그가 콘돔을 사러 나갔다. 이미 다 드러낸 속셈이지만 난 고민 끝에 콘돔을 챙겨가지 않았다. 그가 어마어마한 사실을 털어놓은 시점에 대해 난 감히 ‘늦었다’고 말하겠다. 준비가 전혀 안된 상황에서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길고 긴 애무 끝에 드디어 일을 치르려 하자마자,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딱 1분 30초 만에 끝이 난 그 시점. “나 사실 처음이었어”란 말의 충격이 ‘조루’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안도로 무마될 수 있다는 점에선 적당한 시점이라고 봐야 하나. 어쨌든 단 한 번으로 내 걱정을 없앨 수 없었으므로 두 번째 시도가 확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과는 달리 그는 잠을 청하려고 했다. 혹시 또 빨리 사정해버릴까 봐 굉장히 걱정하는 눈치다. 1분 30초라는 최단 기록은 그에게도 충격이었던 것 같다. 그에게 ‘첫경험’이란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이대로 끝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먼저 들렸다. 10만 볼트쯤의 전류가 흐르는 듯 그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다. 그는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우리는 꼭 껴안은 채 10분 동안 가만히 있었다. 난 심각해지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 듯, 마치 첫경험인 남자를 열 명 정도는 만나본 듯 행동했다. 사실 너무 놀라서 어떻게 할지 몰랐을 뿐이지만. 분위기도 바꿀 겸, 와인 한잔 하자며 마주앉았다. 그는 그간의 상황을 설명했고 난 자연스럽게 이해했다. 시기를 놓쳤더니 사귄 여자들이 모두 경험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고 했다. 파트너가 경험자란 사실은 그에게 설명하기 힘든 엄청난 부담이었다. 두 번째 시도는 오래 진행됐다. 혹시 금방 사정할까 하는 부담감 때문인지, 엄청난 첫경험으로 인한 벅찬 느낌 때문인지 내가 배려를 받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질이 밤새는 줄 모른다’는 말은 이십대 중반을 넘어서 첫경험을 한 남자를 위해 만들어진 속담이라는 확신으로 글을 마치겠다. 전에는 느린 속도로 애를 태우더니 후에는 엄청난 욕구의 바다에서 헤엄치느라 굉장히 피곤하게 만들었으므로. 또한 의욕만 앞서고 스킬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그는 그리 만족스러운 파트너는 아니었다. 어쨌든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설명해주지 않아도 당신은 충분히 해낼 수 있다. 늦었다고 생각한 때가 가장 빠른 때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때는 아니란 점을 명심하길. 만약 ‘마흔 살까지 못해본 남자’가 되어 그 희소가치 때문에 많은 여자들이 덤비는 순간을 원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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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y 기성율
ILLUSTRATION 장재훈
Editor 성범수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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