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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색일기(四色日記)

누구는 그녀와의 짜릿했던 섹스 횟수를 적고, 누군가는 구상 중인 SF 소설의 시놉시스를 그려 넣기도 한다. 아, 물론 가계부로 활용하는 이도 있다. `일기(日記)`란 그날그날 떠오른 단상을 끄적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다. 남에게 말하기 힘든 내밀한 이야기도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다시 8월의 일기, 아니 월기(月記)를 써내려간다.<br><Br>[2008년 8월호]

UpdatedOn July 25, 2008

illustration 차민수

거짓말 안 하고 살아갈 순 없을까

애초에 불가능한 미션이라는 걸 깨달았어야 했다.
일주일, 아니 단 하루만이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건
손짓과 발짓만으로 의사소통을 했던 머나먼 원시 시대에나 가능했던 일이다.
그것이 나의 결론이다.
Editor 박지호

솔직히 별 대단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딱 일주일만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 말이다. 얼마 전 대학 동기 녀석이 찾아왔다. 바쁜 업무를 탓하며 다음에 술 한잔 하자 하자 했던 게 어느덧 2년이나 흘렀다. 평소 욱하는 성격이 있는 그 녀석이 “이러다가 얼굴 잊어먹겠다”며 다짜고짜 회사 앞으로 찾아와 전화부터 걸고 본 것이다. 빡빡한 마감 일정 탓에 짜증이 밀려왔던 것도 잠시, 역시 오랫동안 가까웠던(親舊) 친구란 좋은 것이다. 스르르 눈을 감은 채 까마득한 옛 추억을 더듬다 보니 풀리지 않는 원고 한 토막쯤이야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편안한 마음으로 수다에 몰두할 수 있었다.
문득 이상한 점이 하나 눈에 띄었다.
분명 카페인을 섭취하면 심장박동이 빨라진다는 이유로 커피를 전혀 마시지 않던 녀석이었는데…. “어, 내가 그랬었나? 그거야 명숙이에게 잘 보이려고 그랬던 거지. 걔가 평소 ‘페어 트레이딩’이니, 뭐니 하면서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는 건 범죄 행위라고 핏대를 올렸었잖아. 걔랑 깨지고 나서는 ‘XX벅스’ 없이는 못 산다, 야.”
이런, 젠장. 네가 바로 여자에게 작업을 걸기 위해서는 간도 쓸개도 다 빼버린다는 그 몹쓸 ‘라이어’였구나. 그러고 보니 나는 얼마나 거짓말을 많이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영화 <라이어>에서 ‘아빠가 딱 하루만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해달라’는 아들의 소원이 이루어진 탓에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는 짐 캐리의 코믹 연기를 킥킥거리며 지켜봤던 아련한 기억도 떠올랐다. 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성인들은 평균 8분에 한 번, 하루에 최소 2백 번 거짓말을 한다는 미국 심리학자의 연구 결과도 나와 있었다.
결론이 뻔히 보이는 게임이었지만 그래도 한 번 해보기로 했다. 나는 삐딱하게 사물을 바라보는 애티튜드로 간신히 밥벌이를 하는 잡지 에디터니까. 물론 당신이 짐작하듯 실험은 처절한 실패로 끝났다. 2백 번까지는 아니었지만, 점심 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나는 이미 27회가 넘는 거짓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능글맞게 토해내고 있었다. 멍한 정신으로 급하게 올라탄 택시 안에서 운전기사는 때늦은 ‘노무현 욕’을 해대었는데 귀찮은 마음에 어설픈 웃음만 흘리며 동의를 표시했던 게 그날의 첫 번째 거짓말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울리기 시작한 전화벨. 나는 20분 동안 10통도 넘는 보도자료 문의 전화를 받으며 “아, 너무 좋네요!” “언젠가 꼭 한 번 다뤄볼 만한 아이템이에요!”라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수시로 내뱉어야 했고, 옆 부서 여자 후배에게는 “오늘 입은 꽃무늬 스커트와 한쪽으로 틀어 올린 ‘똥’머리가 환상적으로 어울린다, 야!”라는 멘트를 습관적으로 흘리고 있었다. 느닷없이 6개월 만에 메신저로 말을 건 친구 녀석은 그새 회사를 옮겼는지 새로운 보험 상품 가입을 권유하고 있었고 내 입에선 “사무실에 들러서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들어보겠노라”는 순도 100%의 거짓말이 술술 흘러 나왔다.
점심을 먹으며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크든, 작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사회생활을 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아, 그렇게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지 말아주길 바란다. 나는 아무래도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근성 좋은 한민족의 유전자를 제대로 타고나지 못한 듯하니까.
일주일 내내 술에 절어 지내다가 일요일 하루, 맘먹고 종일 잠만 잤다. 밥 먹기도 귀찮아서 샌드위치로 대충 때우고는 브라운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낄낄대고 있었다. 역시나 밤 10시쯤 슬슬 배가 고파왔다. 집에는 먹을 것 하나 없고, 일요일 야밤에 문을 여는 식당이 있을 리도 없었다. 아, 다행히 집 앞에 24시간 문을 여는 포장마차가 하나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듯한 앳된 남자아이 둘만 술에 잔뜩 취한 채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구석에 앉아 후루룩 면발을 입에 밀어 넣고 있을 무렵, 머리를 짧게 민 남자아이 하나가 비틀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형,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요.”
내일모레 군대에 간단다. 그것도 집안의 전통에 따라 해병대로. 친구들 중에 가장 먼저 입대를 하는 탓에 그는 불안한 게 너무나도 많았다. “저기, 군대에 가면 배울 것도 꽤 많은 거죠? 여자친구도 조국을 지키는 내 모습을 자랑스러워하며 끝까지 기다려주겠죠?”
순간 섬광처럼 떠오른 생각 하나. 지금 진실을 이야기하면 나는 거짓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채 오늘 하루를 보내는 것일 텐데. 덧붙여 거짓말에 얽힌 무수한 과거 에피소드가 빛의 속도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옛날 그 아이는 알까? “오빠가 저 친구처럼 멋있어지려면 당장 이빨 교정부터 해야 해!”라는 지극히 솔직한 멘트가 두 사람의 관계를 파국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어정쩡하게 학생운동에 연루되어 경찰을 피해 학교 안에만 갇혀 지내야 했던 철없던 시절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해야 한다”라고 부모님께 거짓말을 했던 내 행동은 옳은 것이었겠지? 안 그러면 아버지는 진즉 혈압으로 쓰러졌을 테니까.
모르겠다. 다른 건 몰라도 너의 여자친구는 한 달도 채 지나기 전에 너를 떠날 마음을 품을 게 분명할 텐데. “응.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인데, 뭐. 노력만 하면 배울 것도 꽤 많아. 여자들이 좋아하는 멋진 남자가 돼서 돌아올 수 있단다.”
아이야, 거짓말을 하든 말든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하단다. 정글과도 같은 군대에서 부디 무사 귀환하기를,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선배 입장에서 간절히 빌어주마. 비록 내일 아침이면 너의 이름을 까맣게 잊어버릴지라도.

아빠도 아기를 키운다고요

아빠라는 존재는 엄마에 비해 아기에게 언제나 무심한 쪽이다.
남자들은 태생적으로 어르고 달래는 것에 익숙지 않다.
결국 우리 아빠들이 할 수 있는 건 세상에 넘쳐나는 물건들 중에서 아기를 위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거다.
난 스스로 그렇게 살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ditor 성범수

아빠도 아기를 키운다. 그건 명명백백한 진실이다. 물론 아기는 엄마를 찾는다. 아기가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 침대에서 떨어진 적이 있다. 아기를 안전하게 맡겠다는 다짐을 듣고, 부인은 이유식을 만들고 있었다. 무심한 아빠인 난 잠깐 졸았다. 그리고 제1차 침대 낙하 사건이 발발했다. 하지만 아이는 근거리에 있는 아빠가 아닌, 부정확한 발음으로 엄마를 찾았다. 그래 맞다. 아직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 ‘엄마’밖엔 없다. 가끔 아빠를 부르긴 하지만, 기적과 같은 상황에만 발생한다. 빈도를 따지면 9.99 대 0.01 정도 된다고 보는 게 맞다. 서운하냐고? 절대 그렇진 않다. 부담 없는 게 되레 좋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김춘수는 노래했다. 불러주지 않으면 난 아이의 꽃이 될 필요가 없다.
‘엄마’라는 단어가 만약 아빠인 나를 의미하는 거였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어쩌면 이것도 역사를 좌지우지하던 남자들의 농간이었을지 모른다. 아기가 가장 빠르게 익히는 단어를 여자의 호칭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밖에서 활동해야 하는 남자는 매번 부름에 답할 수 없었을 거다. 결국 여자에게 ‘엄마’라는 호칭을 떠넘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이런 과거 정황이 내 억측이 아닌 사실이라면, 선견지명의 천재적 기량을 선보인 선조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어쨌든 엄마의 몫이 됐다. 그렇다고 초보 아빠인 내가 손 놓고 있는 건 아니다. 아기와 관련된 모든 일들은 철저히 분업돼 진행된다. 물론 최종 결정은 같이 한다. 하지만 조사는 각자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이뤄진다. 예정일보다 6주 먼저 태어난 내 아들은 2.39kg이었다. 건들기만 해도 부러질 것만 같은 모습에 난 결단을 내렸다. 미국 분유가 극단적으로 아기를 성장시킨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사에 착수했다. 한국에서 주목하는 미국 분유의 양대 산맥은 씨밀락과 엔파밀이다. 그들의 차이는 성분에 있다. 씨밀락은 철분 쪽이 강화돼 있고, 머리를 좋게 하는 DHA와 신경계의 신호전달 체계를 위한 ARA는 엔파밀 쪽이 더 높았다. 분유만 먹일 거라면 엔파밀을 택했겠지만, 모유 수유를 함께하기에 DHA와 ARA를 제공하는 데 문제는 없을 듯했다. 난 뼈를 튼튼히 해줄 철분이 강화된 씨밀락을 택했다. 작게 태어났기에 성장 발육 쪽에 무게를 둔 선택이었다.
과학적인 확인이 불가한 많은 사례들이 인터넷엔 난무한다. 하지만 흔들릴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 어떤 연구 보고도 분유를 먹고 자란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대한 장기적 조사 결과가 없으니까. 그리고 분유회사에선 계속적으로 업그레이드란 명목으로 분유를 개선한다. 결국 어떤 분유를 어떻게 선택하느냐보단 부모가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보양하면 되는 거다. 물론 광우병 사태로 우리도 크게 한번 흔들렸다. 변형 프리온 단백질이 우유엔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믿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보고를 찾아냈다. 결국 동물 사료를 사용하지 않는 뉴질랜드 분유 케리케어와 철저한 검증으로 유명한 일본 분유, 그리고 꽤 인기를 끌었던 독일산 유기농 홀레 분유로 교체를 고민했다. 하지만 아기에 따라 선호하는 분유가 다르기에 익숙한 씨밀락의 유기농 분유를 택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기저귀도 복잡다단하긴 마찬가지. 인터넷에 모든 정보가 들고나기에 평판에 따라 움직이기 쉽다. 하기스도 써봤고, 미국산 팸퍼스, 일본산 팸퍼스도 사용해봤다. 하기스는 소변이 뭉쳐 무거워진다는 단점이 있었고, 미국산 팸퍼스는 은은한 향기로 채워져 소변 냄새를 어느 정도 차단해줬다. 하지만 뭔가 인위적인 냄새가 싫었다. 일본산 팸퍼스는 화학 약품 냄새가 났다. 결국 우린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한 일본 무늬망 기저귀를 택했다. 물론 세븐스 제너레이션 같은 유기농 기저귀가 있지만,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재정적으로 버틸 재간이 없을 듯했다.
아빠인 나는 기초 생활재에 집중하는 편이다. 편집증적인 성격이 있어 만족하지 못하면, 동이 틀 때까지 조사를 거듭하는 게 내 적성에 맞다. 아내는 대범하고 속이 깊어 칭얼대는 아기를 돌보는 데 적임자라 판단했다. 아아, 내가 하는 일이 한 가지 더 있다. 난 아기 옷을 담당한다. 한국의 아기 옷은 너무 비싸다. 결국 출장이 잦은 난 외국에서 옷을 사온다. 베이비 갭, 짐보리, 올드 네이비, 자라, H&M엔 괜찮은 아기 옷들이 차고 넘친다. 그리고 가격도 저렴하다. 최근 내가 가장 주목하는 브랜드는 드팜(DPAM)이다. 얼마 전 한국에도 론칭한 걸로 안다. 어쨌든 외국에 가면 드팜 매장을 찾아 나선다. 그들의 상상 넘치는 디자인이 그 옷을 입는 아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다. 아기를 ‘소황제’처럼 키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런 집착에 극성스럽다는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라면 난 더 극성스러울 수 있다. 난 여러 이유로 엄마인 것보다 아빠인 게 훨씬 좋다. 흔하게 부르는 ‘엄마’라는 호칭이 아닌 어렵게 익혀 부르게 되는 ‘아빠’라는 존재가 나라는 게 진정 감사할 따름이다. 육체적으로 어르고 달래지 않더라도, 먹이고 씻기지 않더라도 아빠도 아기를 키운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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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ration 차민수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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