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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편견을 거스르다, 미얀마

On March 24, 2008

울고 있었다. 미얀마 인레 호수에 발을 내딛은 지 사흘째. 음영 짙은 호수는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새벽이면 발로 노를 젓는 인따족들이 고기잡이를 위해 나섰고, 언덕 위 황금 사원에서는 낮은 읊조림이 파문처럼 흩어졌다.이방인의 가슴을 쓸어내리는 불경 소리였고, 나지막한 삶의 소리였다.<br><Br>[2008년 4월호]

words&photography 서영진(여행 칼럼니스트) Editor 이지영

여행자들은 참 귀가 얇다. 책 한 권에 낯선 장소와 사랑에 빠지고 서툰 일탈을 꿈꾼다. 소란스런 소식만 접하면 ‘여행 자제 국가’로 섣불리 낙인을 찍기도 한다. 순진한 여행자들을 탓할 수는 없겠지만 미얀마는 그런 면에서 엉뚱한 피해자다. 군부 통치 이후 오랜 기간 폐쇄돼 있던 미얀마는 지난해 분규까지 발생해 조바심을 자아냈다. 베트남, 라오스 등 동남아시아의 새로운 여행지를 쫓는 젊은 마니아들에게도 미얀마는 선뜻 넘어서기 힘든 미완의 땅이었다.
미안하지만, 착각 혹은 편견이었다. 미얀마를 떠올리며 떨 필요는 결코 없다. 동남아시아 지역 중 안전도로 따지면 1급 수준이다. 밤길을 걸어도 야시장을 혼자 다녀도 괜찮다. 그 사람들, 카메라를 들이대면 성근 치열을 드러내고 민망할 정도로 환하게 웃는다. 불교를 국교로 하는 착한 민족성 때문에 화내는 모습을 보기도 힘들다. 유럽 청춘들이 꾸준히 찾는 외딴 여행지인 미얀마는 닫혀 있고 내성적이지만 속은 당황스러울 만큼 고혹하다. 시간을 거스르는 융성한 불교 유적과 소수 민족들의 천진난만한 삶이 진하게 녹아 있다. 내 인생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신새벽도 그곳에서 맞았다.
미얀마 최고의 보물은 북동쪽 고산지대인 인레 호수에 숨겨져 있다. 곳곳에 위치한 불교 흔적만 섭렵했다면 미얀마의 감동은 웅장하거나 경건함 쪽에 가까울지 모른다. 정신이 아득해진 것은 산속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그 호수 때문이었다.
인레 호수의 풍광은 미얀마에서 지나쳐온 다른 것들과는 다르다. 미얀마에서 사실 내륙 깊숙이 여행하는 것은 꽤 드문 일이다. 소통을 위해서는 한 달 월급과 맞먹는 값비싼 경비를 치러야 한다. 호사스런 관광객들만 닿을 수 있는 오지의 산정 호수는 삶의 모습도, 그 여운도 독특하다.
고산지대 주민들은 버마족이 아닌 대부분 카렌족이나 샨족이다. 붉은빛 두건을 쓰거나 기다란 목에 금빛 굴렁쇠를 차고 미모를 자랑한다. 외딴 촌구석이라고 만만하게 봐서는 곤란하다. 카렌족 여인들은 이방인 사내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오똑한 코와 살인 미소를 지니고 있다. 미얀마에는 160여 개의 소수민족이 그렇듯 공존하고 있다.
이 지역 부족 중 호수의 터줏대감은 인따족이다. 호수 위에 수상 가옥을 짓고 수경 재배를 하며 살아간다. 호수에서 태어나 자라고 수상 학교를 다니며 물 위에서 생을 마감한다. 해발 875m에 위치한 산정 호수에 수상 마을만 17곳이나 된다. 위성 안테나가 세워진 제법 반듯하고 운치 있는 가옥들도 있다. 마을 곁으로는 수상 재배지가 늘어서 있는데 이들은 호수에서 자라는 갈대를 이용해 밭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은 뒤 토마토나 무공해 야채를 재배해 자급자족한다. 수초를 잘라서 비료 대용으로 사용하는 친환경 농법이다. 수상 사원, 수상 레스토랑, 직물공장, 대장간 등 물 위에는 그들만의 군락이 옹기종기 형성돼 있다.
인따족들은 노를 발에 걸어 젓고 다니는 특이한 풍습을 지니고 있다. 장딴지 굵기가 강호동 부럽지 않다. 인레 호수가 세간에 알려진 것도 인따족들의 낯선 모습 때문이다. 호수가 넓어 방향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는데 나룻배 위에 도열해 긴 장대로 물을 쳐서 고기를 쫓는 풍경은 한가롭기까지 하다. 일출, 일몰의 호수에서 인따족들이 고기를 잡는 모습은 파노라마 영화의 한 컷 같다. 수상 사원의 불경 소리까지 물 위에 깔리면 몽환적인 분위기마저 연출된다. 그윽한 산정 호수와 수상 가옥이 펼쳐진 이 일대는 <내셔널 지오그래피>의 단골 촬영지이기도 하다.
인레 호수 주위로는 추억의 5일장이 들어선다. 장날만 되면 호수와 산속에 살던 이 일대 소수민족들이 야채며 생선들을 내다 판다. 정육점도 들어서고, 휘발유도 팔고 없는 게 없다. 해가 뜨면 장터로 몰려드는 다양한 부족들의 행렬은 장관을 이룬다. 그 고요한 호숫가가 유일하게 북적거리는 날이다. 어깨에 광주리를 멘 샨족 아낙네는 이방인과 마주치면 먼저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태국, 중국, 미얀마의 접경에 거주하는 때 묻지 않은 소수민족들을 이곳 5일장에서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그동안 미얀마를 찾던 사람들은 불교 성지 순례를 위해서였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바간이었다. 내륙 한가운데 위치한 바간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 3대 불교 유적 중 한 곳.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드르 사원과 어깨를 견주는 불교 성지로 1천여 년 전 건설된 2천5백여 개의 탑과 사원들이 황토빛 땅 위에 끝없이 늘어서 있다. 11세기 바간 왕조가 세워지면서 전국에 4백만 개가 넘는 사원이 들어설 정도로 미얀마의 불교문화는 번성했다.
거칠고 오랜 생채기를 지닌 바간의 탑들은 외형만 도드라지게 보여주지 않는다. 탑의 꼭대기는 사람 한 명 간신히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을 통해 속세와 이어진다. 담마양지 사원, 아난다 사원 등 웅대한 사원들도 많지만 인적 뜸한 돌탑에서 홀로 만끽하는 휴식은 거룩하다. 이방인들은 거미처럼 벽을 기어올라 한 뼘도 안 되는 공간에서 드넓은 평원과 시선을 맞춘다. 가부좌를 틀고 작은 포켓북을 꺼내 독서를 하는 여유와 탑 안에 좌정한 부처의 기운이 맞닿는 듯하다.
바간 여행의 극치는 쉐산도 사원에서 바라보는 일몰이다. 탑 정상을 에워싼 빽빽한 인파가 싫다면 한적한 바란미얀 탑에 올라도 좋다. 해넘이로 이어지는 30분, 극락정토와 수많은 탑들 너머로 해가 지는 광경은 따사롭고 숙연하다.
미얀마가 순결한 자연과 불교문화로만 채색된 것은 아니다. 도시인의 일상은 미얀마의 관문인 양곤이나 제2 도시 만달레이에 짙게 녹아 있다.
양곤대학교 옆 골든밸리 지역은 서울의 미니 청담동 분위기다. 집도 으리으리하고 명품 숍도 들어서 있다. 최근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웨딩 사진 전문 스튜디오도 들어섰다. 연인들은 인야 호수나 깐도지 호수에서 주말을 보내는데 이 일대 청춘들의 복장은 여느 미얀마 사람과는 다르다. 전통적으로 미얀마 남자들은 대부분 치마처럼 생긴 론지를 입고, 여인들은 하얀 피부를 유지하기 위해 얼굴에 타네카라는 나무 가루를 바른다. 재래시장에선 말린 타네카 나무를 장작처럼 쌓아놓고 팔기도 한다.
요즘 미얀마의 대담한 신세대들 사이에선 청바지와 짧은 치마, 민소매 바람이 불었다. 타네카도 잘 바르지 않는다. 값비싼 화장품이 최고의 선물로 여겨지곤 하는데 몸매가 드러나는 치마 때문인지 여인들은 잘록한 허리에 육감적인 몸매를 지니고 있다.
혹 ‘양곤의 된장녀’와 차를 마시려면 사쿠라 타워로 가야 한다. 도심 사쿠라 타워 20층에 있는 티리피샤야 스카이라운지는 양곤의 패션 리더들이 밀담을 나누는 곳으로 분위기도 좋고 주말이면 공연도 한다. 한류 때문에 한국인들의 인기가 꽤 높으며 말을 걸면 상당히 좋아한다.
양곤에는 미얀마인들이 성지처럼 여기는 쉐라돈 파고다가 있다. 높이 99m에 수천 톤의 실제 황금으로 단장된 쉐라돈 파고다에서 연인들은 데이트를 즐기고 가족들은 불전 안에서 도시락도 먹고 낮잠도 잔다. 미얀마에서 불교와 삶은 그렇듯 밀착돼 있다.
승려와 중생이 어우러져 사는 모습은 미얀마 제2 도시인 만달레이에서 더욱 자연스럽다. 대규모 승가대학이 있는 만달레이에는 미얀마 스님의 절반 이상이 머물고 있다. 분홍빛 가사를 입은 틸라신(비구니), 미니 트럭에 매달려 가는 폰지(남승) 등을 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만달레이는 미얀마의 마지막 꽁바웅 왕조의 도읍지로 영국에게 나라를 뺏긴 슬픈 역사의 시발점이 된 도시다. 이곳의 마하 간다용 짜용 수도원은 스님 수천 명의 탁발 공양 행렬이 장사진을 이루는 곳으로 점심 탁발 공양 때는 일반인이 직접 밥을 퍼주기도 한다. 스님들은 탁발 공양 때 늘 애처로운 맨발이다. 만달레이의 우뻬인 다리 밑 풍경이나 형광등으로 불을 밝힌 야시장의 정취도 탐스럽고 활기차다. 모두가 미얀마의 어제와 오늘이 가지런하게 공존하는 모습이다.

울고 있었다. 미얀마 인레 호수에 발을 내딛은 지 사흘째. 음영 짙은 호수는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새벽이면 발로 노를 젓는 인따족들이 고기잡이를 위해 나섰고, 언덕 위 황금 사원에서는 낮은 읊조림이 파문처럼 흩어졌다.이방인의 가슴을 쓸어내리는 불경 소리였고, 나지막한 삶의 소리였다.&lt;br&gt;&lt;Br&gt;[2008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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